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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미 온스케(鶴見俊輔·83·사진)는 전쟁행위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일본우익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9조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다. 하버드대 철학과 출신의 그는 1979∼1980년 캐나다 맥길대에서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한 2개의 영어 강의를 펼쳤다. 하나는 1931∼1945년을 다룬 ‘전시기(戰時期) 일본의 정신사’이고 다른 하나는 1945∼1980년을 다룬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사’다. 후자가 2001년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라는 제목으로 국내 소개된 데 이어 전자가 번역됐다.》
저자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15년 전쟁’이라는 하나의 전쟁개념으로 통칭한다. 이는 일본의 지도층이 내부 사회개혁 노력을 회피하고 군사력에 의한 국외 진출을 선택한 뒤 ‘전투 상태를 종결지을 능력의 결여’로 전쟁의 수렁에 계속 빠져들었다는 인식이다.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를 상징하는 용어가 ‘전향(轉向)’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변절과 냉전시대 사상범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 단어는 실은 철저히 일본산이다. 전향이란 용어는 본디 ‘사회에 대해 행동할 수 있도록 사색의 법칙을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1920년대 공산주의자들이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어적으로, 1928년 치안유지법이 공포된 뒤 사상경찰들이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온갖 고문과 회유를 통해 국가주의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전향이란 용어가 쓰였고, 조선에도 적용된 것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이런 국가의 사상적 억압에 너무 쉽고 빠르게 굴복했다. 1933년 일본공산당 위원장이었던 사노 마나부(佐野學)가 전향 선언을 한 뒤 불과 3년 사이에 공산당 관계자 중 70% 이상이 전향했다. 또 전쟁을 반대했던 기독교와 불교 지도자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전향의 동기를 분석할 때 ‘지조 없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신한 행위’라는 식으로 쉽게 설명해 버린다. 그러나 온스케의 분석은 섬세하고 냉철하다.
먼저 당시 전향자들이 전향 이유로 가장 많이 내세운 것은 그들의 헌신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민대중과 유리됐다는 불안감이었다. 당시 일본 민중 대다수는 초기 승리에 도취해 전쟁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 또 전향 대상자들이 도쿄데이코쿠(東京帝國)대를 정점으로 입학만 하면 출세가 보장되는 엘리트 교육의 총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정치적 견해를 바꾼다 해도 지도적 지위는 변함없을 것이라 믿고 있던 점도 손바닥 뒤집듯 전향을 하게 만든 요소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원인은 이들의 사상이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라 영글지 못했고 일본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같은 분석을 토대로,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골수 공산주의자들도 시대착오적 스탈린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온스케는 오히려 전향서에 서명은 했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주의에 탄력적으로 저항한 지식인들을 주목한다. 공산주의 사상을 죽음으로써 지키지 못한 것을 꾸짖는 아버지의 비판을 견디며 군국주의에 저항하는 보통 시민의 몸부림을 문학작품으로 그린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일왕 숭배와 스탈린주의의 허구성을 함께 비판한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 소련과 일본의 전쟁을 막기 위해 소련간첩 리하르트 조르게를 도운 구즈미 후사코(九津見房子)가 그들이다.
전향에 대한 이런 통찰은 식민지 조선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도덕적 잣대로만 전향을 평가한다. 오히려 이런 도덕주의적 시각이 전향이란 문제를 역사적 교훈으로 발효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온스케의 다음 말을 음미해 보자.
“만일 우리들이 1931년에서 45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전향 현상 전체를 ‘배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악(惡)으로 간주해 버린다면, 우리들은 오류 속에 있는 진리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전향 연구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속에 포함돼 있는 진실이 진실 속에 포함돼 있는 진실보다 우리들에게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원제 ‘戰時期日本の精神史 1931∼1945年’.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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