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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은 지난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새로운 세계 금융경제 질서 구축을 논의하는 지구촌 정상회의(글로벌 거버넌스)로 부상했다. 기획재정부와 외교통상부는 G20 정상회의 결과 브리핑 자료에서 “지난 30여 년간 지속돼온 G7(선진 7개국)과 G8(선진 7개국+러시아) 체제가 이제 G20으로 재편되면서 G20이 ‘글로벌 프리미어 포럼’(Global Premier Forum)으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주요 선진국뿐 아니라 중국·한국·인도 등 신흥 개도국이 함께 참여하는 G20은 비공식 운영위원회 격으로 아직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내년부터 이 정상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사실 G20은 지난 1999년 각국 재무장관 회의체로 출발했다. G7은 재무장관 회의와 정상회의 두 축으로 열리는데, 이번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G20 역시 재무장관 회의와 정상회의를 함께 개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를 주도한 건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영국 고든 브라운 총리다. 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경제 질서를 새로 재편하는 구도 속에서 미국과 영국이 G20이라는 틀을 내걸고 먼저 치고 나선 것이다.
브라운 영국 총리, 한국 유치에 발 벗고 도와
눈여겨볼 대목은 G20을 주도하는 국가가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이란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 고든 브라운 총리, 오스트레일리아 케빈 러드 총리, 캐나다 스티븐 하퍼 총리 등이 모두 G20 정상회의 한국 유치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이다. 사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영국 재무장관으로 있을 당시 G20 재무장관 회의의 주역이었다. 지난해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고든 브라운이 가장 먼저 G20을 정상회의로 격상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위기 상황을 활용해 영국이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는 국제 금융경제 논의기구를 만들려고 일을 도모한 것이다. 이번 유치 과정에서 미국 못지않게 영국은 한국의 내년 정상회의 유치를 위해 발로 뛴 국가다. 이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브라운 총리가 직접 나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설득했고, 영국 총리실에서는 장관급 인사를 파견해 내년 정상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작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G20 틀이 미국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알고 오바마 대통령도 의기투합하면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까지 포함하는 영미권 국가들이 다 같이 G20 우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전 지구적 경제질서 혼돈 속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이자 책임국가’라는 비판에 직면해 기력을 잃은 영미권 국가들이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데 뭉친 양상이다. 반면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과 일본은 여전히 G7 이나 G8, 혹은 G14 체제를 선호하고 있다. 위기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생각하는 유럽 국가들은 영미식 금융 세계화를 대체할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 재편을 추구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은 특정 논의 체제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G7이든 G20이든 어디서나 중국을 모셔오려고 안달이기 때문이다. 위기 이후의 새로운 국제금융 체제 구축에서 미국·영국의 입장과 유럽연합 국가들의 입장, 중국과 일본의 입장 등이 한창 힘겨루기를 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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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해 대변해 줄 제3국이 필요하던 참
이런 와중에 한국이 G20 정상회의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외교통상부에서 G20 정상회의를 총괄하는 경제기구환경과 서상표 과장은 “지난해 11월 워싱턴 G20 1차 정상회의에 갔을 때는 우리나라가 이 정상회의 틀에 끼는 것 자체가 과제였다”며 “그 뒤 한국이 경기 부양을 잘하고 빠른 경기 회복을 하고 있는 점을 내세워 우리가 먼저 리더십을 발휘해보자고 했는데 이렇게 성과가 클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주요 20개국의 일원에 들어가 선진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갑자기 ‘좌장’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사실 한국이 내년 정상회의를 개최하게 된 배경에는 우리나라가 마침 내년 G20 재무장관 회의 의장국(의장국은 1년씩 순회)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한국 개최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건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워싱턴 1차 회의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사공일 당시 대통령 경제특보에게 G20 정상회의 기획조정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기면서 회의 유치를 위한 태스크포스팀 구성을 지시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있었던 것일까?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새로운 글로벌 금융경제 질서 형성에 앞장섰다가는 적반하장이란 비판을 듣게 될 것이 뻔했다. 오바마로서는 미국의 입장을 앞장서 대변해줄 제3국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사공일 위원장은 래리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올해 세 번이나 특사 자격으로 만나 G20 의제 설정을 논의한 바 있다.
오바마의 G20 정상회의 구상에는 기축통화 달러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경제패권을 방어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이는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약속한 ‘글로벌 불균형 해소’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은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중국·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규모 흑자를 일컫는 말이다.
미 무역적자 축소 위한 방안 담아
이번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 합의문의 ‘부속서 1·2’는 “우리 회원국들은 지속될 수 없는 세계 불균형을 피할 수 있는 건전한 경제정책을 담보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보호주의를 거부하고 개방시장을 지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미국 등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에 직면한 G20 회원국들은 △민간 저축지원책을 시행하고 △수출 부문을 강화하기로 한 반면, 지속적인 대외 무역 흑자를 유지하는 G20 회원국들은 △국내 성장 원천을 강화하고 △금융시장 왜곡을 축소하고 △수요 증가에 대한 제약을 해제하기로 결의했다. 미국은 수출을 늘리는 반면, 중국·한국·일본 등 무역흑자국들은 수출을 줄이는 대신 미국 제품 수입을 늘리고 수출보다 내수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현재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는 달러 약세를 한·중·일이 용인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달러 약세 속에서 미국 기업은 수출 가격 경쟁력이 향상되는 반면, 한국 기업들은 수출이 둔화·감소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부속서는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동안 수출 증가를 위해 취해온 환율 개입, 금리 정책, 국채 발행 등 금융시장 왜곡 정책들을 축소하고, 해외 수입 제품의 수요 증가를 제약하는 각종 비관세 장벽도 없애기로 약속했다. 물론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수출이 늘어 미국 경제와 소비시장이 살아나야 한국의 수출도 증가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볼 때는 우리나라에 이득이 될 게 없는 약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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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회의 결과에 따른 한국의 수출 타격을 감안한 것일까?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0월6일 선진 33개국 수정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3.4% 수준에 도달했다가 2010년 2.2%, 2014년 2.1%로 점차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획재정부 G20기획과 쪽은 “이번 G20 합의로 우리나라 수출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건 아니다”라며 “글로벌 불균형은 이번 금융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요인이고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미국 소비가 줄어들면 한국뿐 아니라 세계경제가 다 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투기자금 규제 대신 더 많은 세계화로
사실 ‘G20 지속 가능한 성장체제’라고 이름이 붙은 이 부속서는 미국과 영국이 제출해 합의된 것이다. 이번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 9월9일 오바마 대통령과 브라운 총리는 성명을 통해 “대규모 무역적자국은 수출을 늘리고, 흑자국은 수입을 늘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유럽연합도 중국 위안화 평가 절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과 영국이 ‘약한 달러’ 정책을 표방하면서 직접적으로 동아시아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수출에 많이 의존하는 경제인 독일과 중국은 이 부속서에 미온적 태도를 취했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역설한 것이 ‘보호무역 저지’와 ‘무역 자유화 지속’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워싱턴 1차 회의 때부터 ‘스탠드 스틸’(Stand Still·보호무역주의 동결)을 주창해 선언문에 반영시키고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를 통한 다자간 자유화를 가속화하도록 촉구했는데, 정부는 이것이 한국이 G20 정상회의 리더로 발돋움하는 데 주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합의문 부속서는 “회원국들은 무역 및 투자 개방을 지지하고 보호주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시장 지향적 환율의 맥락 아래서 통화정책을 시행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자본시장 자유화를 포함해 ‘금융 세계화’를 지속하기로 한 것이다. 고삐 풀린 세계화와 시장의 폭주가 유례없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음에도 G20은 여전히 ‘더 많은 세계화’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G7(혹은 G8)이나 G14 쪽을 지키려는 유럽 국가들은 글로벌 금융체제 개혁이 관심일 뿐 보호무역주의 타파나 국제 공조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와 독일은 모든 국제 금융거래에 세금을 매겨 단기 투기자금 이동을 규제하는 ‘토빈세’(Tobin tax)를 도입하자고 제안하는 등 미국·영국 쪽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제를 내놓고 있다. 한국이 제출한 보호주의 저지나 확장적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 의제보다는 금융 규제·감독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조업이 몰락하고 금융산업으로 먹고살고 있는 영국과 미국은 토빈세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지난 8월 영국의 금융감독청(FSA) 터너 청장이 토빈세 도입을 제안한 바 있지만 영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유럽 국가들은 금융감독 강화 주장
김영호 유한대 총장(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현재 글로벌 금융체제 개편 과정에서 신흥국을 대변하는 중국과 인도의 목소리가 있고, 한국은 미국의 이익을 잘 대변해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말로는 개도국과 선진국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한다지만 사실은 선진국 흉내를 내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금융위기에 책임이 없거나 피해를 입고 있는 신흥 개도국과 연합해 새로운 금융질서를 구축하는 일에 나서지는 않고,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영미권 국가들의 이익과 패권을 대변하고 유지하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 총장은 “한국이 G20 정식 멤버로 의장국까지 돼 모처럼 세계금융의 플레이어가 됐으나, 세계 13대 경제대국이라서 의장국이 된 게 아니라 중국·인도·일본의 상호 견제 속에서 제3자로서 ‘비경쟁적 이익’ 때문에 되었다면 아세안 국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G20 회원국은 선진국이 보유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쿼터 지분 5%를 신흥·개도국으로 이전해 신흥국의 발언권을 강화해주기로 한 것과 관련해 G20 정상회의의 주요 성과라고 부각시켰다. 하지만 IMF 지분 문제는 10년 전 동아시아에 대한 IMF 구제금융 정책이 실패했을 때부터 IMF 개혁 방안으로 제출되고 진행돼왔던 것이다. 이번에 미국 등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중국·인도 등 신흥국들은 지분 7%를 이전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이 제시한 ‘쿼터 5% 이전’으로 결론이 났고, 한국은 “쿼터 이전만 빨리 이뤄지면 좋겠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국이 개도국의 이해 저버린 셈
지금 글로벌 경제에서 각국은 저마다 위기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G20 회의 때마다 강조해온 ‘글로벌 국제 공조’는 지난해 위기가 막 터졌을 당시 긴급 대응으로 호응을 얻었을 뿐 이제는 뒷자리로 밀려 있다. 특히 최악의 위기 국면에서 점차 벗어나는 조짐이 가시화하면서 각국이 빠른 경기 회복을 꾀하는 등 ‘실리’를 추구하고, 경제대국들은 위기 이후 새판 짜기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한판 대결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9월 이 대통령과 오스트레일리아 러드 총리는 <파이낸셜타임스> 공동기고문에서 “위기시의 예외적인 조치들을 철회(출구전략)하는 데에는 시기·공조·신뢰가 고려돼야 한다. 각국이 독자적으로 취한 거시경제 전략은 바람직하지 못한 불균형을 낳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러드 총리는 정작 10월7일 전격적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해 출구전략 시행에 들어갔다. 사실상 국제 공조 약속을 깬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자국의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확장적 재정지출 기조를 유지해온 것일 뿐 이것이 국제 공조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국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단지 세계경제를 구출한다는 명분에서 팽창적 재정정책을 펴온 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
우리가 G20 정상회의 개최국이 되어 환호하고 있는 동안,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당사자인 영미권 국가들은 패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며 뒤에서 웃고 있을지 모른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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