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백제 멸망의 원흉 반역자 "예식진"


KBS 역사프로그램에서 '예식진'이라는 백제 고위 관리 묘지석에 관해 방영되었습니다.

너무 쉽게 항복해버린 백제의 의자왕에 대한 미스터리가 밝혀지는 대목입니다.

사비성을 사수하기위한 계백장군의 결사대 5,000 병력이 이슬로 사라지면서 의자왕은 웅진성(공주)으로 방위선을 옮기게 되고, 백제 각 지역의 성들과 합작하여 웅진으로 진격해 온 나당 연합군에 대항했습니다.

철옹성이라고 불렸던 지방 각성이 건재한 가운데 웅진성의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에 대항할 전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항복한 부분이 참으로 아쉬운 사실(史實)이었는데 이번에 KBS가 그 단서를 찾아주었습니다.

문제의 묘지석과 비교하며 주변국 당과 일본의 역사서 내용을 탐색한 결과, 당시 웅진성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예식진’이라는 장수가 반역하면서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투항하게 되고 수많은 백제 고위층들이 치욕적으로 당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KBS는 이 부분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의 세부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토를 달면서 끝을 맺었습니다.

삼국이 힘의 균형을 이룰 때만 해도 당나라는 감히 삼국을 넘보지 못했는데 자기영달을 꽤하며 나라와 왕을 매도하며 내부분열을 획책한 한사람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동북아의 정세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물론 고구려도 비슷한 말로를 걷게 됩니다만)

조상대대로 백제에서 고위직을 이어온 ‘예식진’이라는 한사람에 의해서 삼국의 균형이 무너지고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중국에 넘기고 만 큰 사건이 역사 속에 묻혀버렸을 텐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묘지석의 발견이 새로운 사실(史實)을 알려주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예식진’은 백제 토벌의 일등공신이니, 묘지석 내용대로 당나라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환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백제 장수의 모반으로 인해 의자왕이 항복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그저 우리는 타락해버린 의자왕의 작태와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멸망했다는 정도로 배우고 그렇게 알아왔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질 뿐입니다.

추후, 역사학자들은 보수다 뭐다 하면서, 역사책을 수정하니 어쩌니, 싸우는 데 앞장설 게 아니라 이런 연구에 좋은 머리를 사용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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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보도 내용: 백제 고위 관리 묘지석 시안서 출토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갔던 백제 출신 고위 관리의 묘지석이 중국 시안에서 출토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중국 지린성에서 발간되는 역사잡지 '동북사지' 최근호에 게재됐습니다.

동북사지는 이 묘지석의 주인공이 백제 고위 무관 출신인 '예식진'이라는 인물로 당나라 조정에서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의 정1품 관직인 좌평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동안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이나 고위 관료, 장수로서 묘지석이 중국에서 발견된 인물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과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 등 모두 5명이었습니다.


지린성 김영관 박사 西安 출토 묘지명 주인공 구명

지난해 중국 뤄양(洛陽) 골동품 상가에 출현한 시안(西安) 출토 백제 유민 묘지명(墓誌銘)의 주인공인 예식진(예<示+爾>寔進)은 660년 신라-당 연합군의 백제 정벌전쟁 때 웅진으로 피신한 백제 의자왕을 포로로 잡아 연합군에 바친 예식(예<示+爾>植)이란 인물임을 밝힌 연구 성과가 제출됐습니다.

예식진 묘지명은 기존 백제사에서 알려진 소위 '대성 팔족'(大姓八族) 외에도 예식진과 예군이 대표하는 예씨 종족집단이 웅진을 거점으로 대대로 좌평 직을 세습하면서 백제 지배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케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김 박사는 덧붙였다.

[출처] 백제 멸망의 중심에 '예식진'이라는 반역자가 활약했다.servicekorea|작성자 무재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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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군이 그대로 존재하고, 왜에서 원군이 오고 있던 상황, 조국을 위해 가족을 죽이며 군사 재정비 시간을 벌기 위해 5천의 결사대로 5만의 신라군과 목숨을걸고 싸운 계백같은 인물이 있었던가 하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조국을 등지고 왕을 버린 인물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아픔이 상당히 크군요.

결국 망국의 왕으로 후세에  무능의 왕으로 낙인찍힌 의자왕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할듯하고, 모든역사가 그렇듯이 역사의 정의는 승리한 곳에 있고 망국은 조롱의 대상이 되죠, 후에 문인들이 만들어낸 3천궁녀와 낙화암이 사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것 처럼...

백제가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 처럼 절대 작고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는점, 동북아의 밸런스에 한축을 담당했고 어이 없는 멸망으로 결국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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