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2일 목요일

[펌]남자에게 할말이 없습니다.- 개념탑재목적글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방식에는 오직 법적 제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남자들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혼인적령기가 됐는 데도 남편감으로 찍어둔 남자도 없고 별로 결혼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미혼여성들에게는 가족에서부터 일가친척, 지인들과 직장선배, 상사 할 것 없이 심심할때마다 시집 언제 가느냐는 질문이 다그치듯 쏟아집니다. 결혼하기 싫은데요, 라는 대답이 들려오면 아직 뭘 몰라서 그렇다는 둥, 인연을 못만난 거라는 둥, 혼인의 자유 중에는 혼인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무시됩니다. 남자들은 그런 끔찍하고 지겨운 경험을 보고 들은 적이 없나요? 아니면 그런 경험을 하기가 싫어서 하루빨리 인연을 만나 결혼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집니까? 아니면 스트레스가 쌓여도 꾹꾹 눌러참고 말아버리나요.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고 단 둘이서만 사는 부부도 꽤 이상한 눈초리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늙으면 자식 밖에 없다느니, 물려줄 자식이 없으면 억만금이 있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둥 하는 이야기가 해파리처럼 주변에서 둥둥 떠다닙니다. 부인이 직장을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예요. 부인이나 남편 중 한 사람에게 무슨 신체적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요상한 뒷공론도 돌아요.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운이 좋아 여자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부모님과 남편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외적인 체면이랄까, 평탄을 엄청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산과 양육은 개인의 자유이고 그건 법적으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으니 그게 무슨 부담이고 의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본인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선생님이 학생에게 행사하는 권력 내지 영향력은 어느 정도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에게는 선생님, 혹은 교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할 어느 정도의 의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학교선배가 후배에게 미치는 영향력에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됩니다. 후배에게는 선배의 명령에 따라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때 선배들이 은근히 강요했던 이런 저런 일들 앞에서 당당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분들, 계십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하기 싫으니까 안하는 데요.'라고 말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출산과 양육이 정말로 권리이고 병역과 같은 의무가 아니라면 권리자인 여성들은 '나는 내가 결혼하고 싶을 때 결혼하고 애낳고 싶을 때 애낳겠다'라고 그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어머니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며느리를 상상하실 수 있으십니까? '전 남편을 매우 사랑하지만 제 일도 중요하기 때문에 제 일에 방해가 되는 아이는 낳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로 인해 O씨 집안의 핏줄이 끊어지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당장 싸가지없는 년으로 찍혀서 두고두고 동네방네 회자될 겁니다.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어느쪽 선택을 해도 그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 비슷비슷한 경우에나 적용되는 말이죠.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미혼/기혼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출산율이 낮죠. 모두가 임산부를 축복하고 아이가 태어난 것을 기뻐한다고요? 그런데 왜 직장에서는 여직원이 임신을 하는 것을 싫어합니까? 출산휴가는 당연한 것인데도 그걸 얻어쓰려면 남자동료들의 눈치가 이만저만 보이는 게 아니라서 그 마음고생때문에 법적으로 정해진 휴가를 다 못쓰고 대충 몸을 추슬러 직장으로 돌아간다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 데 그 사람들은 여기 대한민국이 아니라 어디 4차원에 사는 사람들인가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는 그 철옹성같은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군대생활 힘들고 무섭다고 말씀하실 때 그게 엄살이 아니라 진짜라는 거 믿습니다. 얼마나 괴로울지는 제가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안다고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싫은 마음이 이기심이 아니라 진짜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거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한민국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거 결코 쉬운 일 아니라고, 여기서 더 많은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사회적 자살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할 때 좀 생각해보는 척이라도 해보세요. 우리나라 맞벌이 부부 중에 정말로 공평하게 육아를 비롯하여 가사일을 정확하게 1대1 비율로 나누고 사는 사람 얼마 안됩니다. 대개의 경우 여자가 더 꼼꼼하고 세심하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하고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는 문제나, 교육에 관련해서도 여자가 더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쩔 수 없이 여자가 더 빨리 피곤해집니다. 저는 지금 이 나이까지 살면서 구속당하고 얽매이기 싫으니까 앞으로 어지간하면 결혼하지 않을 거고 자식도 안낳을 거라고 말하는 여자들은 많이 봤지만 자기 커리어에 방해가 되니까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본 역사가 없습니다. 정말로 이런 현상이 여자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결혼을 해서 2세를 가진다는 사실은 남자의 사회적 경력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자에겐 방해가 됩니다. 아무리 가사분담에 철저한 남편을 두었다한들 뭔가 일이 터졌을 때, 아이가 아프다던가 사고가 났다던가 하면 결국엔 그 모든 것은 여자의 책임이 됩니다. 둘이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는, 근무시간도, 작업의 난이도도 비슷한 두 부부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병원에서, 혹은 학교에서 직장으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직장상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찍 조퇴하고 싶다고 말하기 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마 어지간한 상사를 만나지 않고서야 여자의 경우 '남편이 어디서 뭘 하길래 자네가 달려가?'라는 말을 들을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건 결국, 똑같이 밖에서 일해도 '아이'에 관련된 문제는 종국에는 여자가 짊어져야 할 책무가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자신의 기쁨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분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세요. 모성신화로 포장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자식인데 당연히 몸에 좋다는 모유수유도 하고 싶고 알러지나 피부질환에 걸리지 않게끔 천기저귀도 채우고 싶고 나중에 크면 유기농 이유식도 직접 만들어 먹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입고 다니는 다림질 열심히 하며 기쁨을 느끼는 여자들이 없는 거 아닙니다. 그런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의무처럼 여기지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데 오직 나 혼자만 아둥바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일도 싫은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두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라는 말이 왜 나오겠습니까. 아무리 좋아하던 것도 일로 변해버리면 싫어집니다.



법으로 정해져있지 않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어떻게 그리 확신합니까?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법이 정해준 모든 기본권을 마음껏 향유하며 살 수 있는 나라였습니까? 우리나라 법 그 어디에도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가 성적 소수자들에게 관대한 나라입니까? 법보다 더 강력한 것이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른바 '암묵적인 룰'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아무 의식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가사일을 '도와준다'고요. 육아와 가사는 아직도 '도와주는' 개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니예요. 하지만 이걸 법으로 정하겠습니까? '남편은 정확히 가사일의 절반을 부담해야 한다'라고요? 법적으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옛날에 양성평등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럼 매맞는 아내들은 뭐고 강간피해자들은 뭐고 직장일과 집안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등허리가 휘는 슈퍼맘들은 뭡니까? 이건 다 엄살입니까? 아무리 죽을 만큼 괴로워도 정말로 죽을 리는 없으니 그냥 참아야 하는 문제입니까? 어떻게 이 엄청난 불공정함 앞에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될 수 있다고 믿는 지 그 두뇌구조가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몇몇 소수의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남성들은 대한민국 여성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여성들이 요구하는 권리 자체가 말도 안되는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요. 제 생각엔 후자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안그래도 부당한 대접과 차별때문에 등허리가 휘고 있는 사람들한테 '권리를 주장하기 이전에 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말하는 건 그 권리요구가 얼마나 정당한 것이든지 간에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거죠. '여자도 군대가라'운운하는 사람들 중에 이렇게까지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자들도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양성평등이다 뭐다해서 사소한 사항에도 발끈하고 시끄럽게 구니까 단지 귀찮은 마음에 입 좀 닥치라는 말을 '여자도 군대 갔다와'로 대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뭐, 그건 엄밀히 말해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전 독심술사는 아니니까요.



모든 국민은 병역의 의무를 부담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있듯이 실제로 여성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이 내는 세금이라고 해서 국방부 예산으로 책정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만약 실질적인 노역으로 부담하는 병역의 의무만이 진짜 병역의무라면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의 대다수 국민들은 납세의 의무만 이행하고 있지 병역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있는 셈이 되겠죠.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때문에 남녀가 부담하고 있는 납세의 의무는 대체로 동등한데 병역의 의무만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다는 겁니다. 예, 분명히 병역의 의무에서 대한민국 성인남성은 대한민국 성인여성보다 훨씬 가중한 의무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드러난 사실의 한쪽 단면만을 본 결과입니다.



국가라는 유기체는 사람의 몸과 같아서 일단 속이 어찌됐든 간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두가지 요건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면역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죽어가는 세포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내는 생명력이죠. 군대가 없는 나라는 존속이 위태롭고 국민이 없는 나라는 아예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군사력이 거의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정치력으로 버티는 나라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케이스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죠. 아무튼 국가를 유지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 두개는 국방과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채워줄 다른 구성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공동체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쇠퇴합니다. 하지만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것은 국방에 해당하는 병역의 의무뿐, 너무나 명확하게도 출산의 의무는 규정되어있지 않습니다. 여성의 자궁없이 사회구성원을 재생산해낼 수 있을 만큼 생명공학이 발달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왜 이 중요한 사회적 의무를 법제화해두지 않았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민법은 제 844조 1항에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추정하는 법규를 정해놓았습니다. '처가 혼인 중에 포태한 자는 부의 자로 추정한다' 그런데 왜 어머니를 추정하는 법규는 없을까요? 생물학적으로 너무나 확실하여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담하건데, 모든 국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는 헌법조항이 법학자들의 머릿속에서 최초로 튀어나왔을 그 시절에 (그 법학자들은 물론, 그들이 만든 헌법을 인준했을 정치가들 역시 모두 남자였고 그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법앞의 평등하고 어쩌고 저쩌고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인간들 중 여성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만) 그 사람들이 미래에는 혼인적령기가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와 섹스를 즐기면서 아이를 낳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직업와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 모든 열정을 거는 여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감히 상상이라도 했더라면 그들은 '모든 국민은 출산과 양육의 의무를 진다'라는 조항을 명시해 넣었을 겁니다. 수천년, 아니 수만년동안 출산과 육아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성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의 혈통을 이어나가야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권의 개념이나 양성평등의 개념이 전혀 없었던 시대이니 그때는 그게 당연했습니다. 인간은 애써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는 종족이라서 자신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일에는 따로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비록 헌법재판소는 제대군인의 빠른 사회복귀를 돕기 위한 군가산점제도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옳게 내리기는 했습니다만 그 주문에서 헛소리를 좀 하긴 했습니다.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는 것은 국민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이른바 신성한 의무를 다 하는 것일 뿐, 국가나 공익목적을 위하여 개인이 특별한 희생을 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였다고 하여 이를 특별한 희생으로 보아 일일이 보상하여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게 특별한 희생이 아닙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빛나고 소중한 시기로 여겨지는 청춘의 한 토막을, 그것도 무려 2년 반이나 되는 시간을 불편한 환경과 재수없는 상관, 불합리한 명령, 짜증나는 동기들 틈에서 낭비해야 하는 데요. 강제적인 군복무는 국가가 국민에게 당연하다는 듯 요구할 수 있는 의무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특정한 상황때문에 초과적으로 부과된 의무이고 그 원인에 어디에 있든 국가는 그 점에 대해서 국민에게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탈을 쓰고 있는 한, 국가는 국민들의 특별한 희생에 대해 보상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그 어떤 국가도, 어떤 통치권력도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의무이고 권리라해도 국민이 요구하지 않았는 데 먼저 나서서 들어준 적은 없습니다. 왜 싸우지 않습니까? 왜 당연한 권리를 쟁취하려 들지 않습니까?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분들 중 특히 남자분들이 제 글을 읽으면서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셨을 겁니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지요. 그 사람들은 그런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껴 마땅합니다. 그들이 이기적이고 몰염치하다고 말하는 우리 젊은 여성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그 할머니의 어머니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몸과 편안함을 돌보지 않고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모습을 지켜봐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대체 뭘 얻었습니까? 훌륭한 어머니, 희생적인 어머니, 위대한 어머니, 진짜 여자의 삶엔 한줌 쓸모도 없는 겉만 번지르르한 모성신화 뿐입니다. 운이 좋아 아내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남편들을 만나 어머니를 공경할 줄 아는 자식들을 낳고 사신 분들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언제나 좋게만 돌아간다면 법은 왜 필요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들은 왜 필요합니까? 여성은 자신이 낳은 아이에 대한 권리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부친과의 관계와 별도로 아이에 대한 모친의 친권행사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TV에서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피켓을 들고서 이혼한 여성에게 그 아이와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시위를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깥일을 해서 따로 재산을 모아두지 않았더니 이혼을 당하고 난 뒤에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자식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취직을 해보려고 해도 젊지도 않고 근무경력도 없고 심지어 예쁘지도 않은 아줌마를 고용해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회는 손가락질을 하고 등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그러니까 이혼은 왜 했냐고, 네가 진작 남편에게 더 잘했더라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분명 부부간의 정조의 의무는 쌍방이 동등하게 부담하는 것일텐데 남자의 불륜은 한때의 바람이고 여자의 불륜은 절대로 지우지 못할 스티그마였습니다.



그랬던 사회를 지금 이만큼이나 바꿔 놓은 것은 모두 우리 여성들의 노력입니다. 국가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요구하고 소리치고 온갖 굴욕과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고 또 싸워서 이룩해낸 것입니다. 여성채용목표제, 모성보호법, 성폭력특별법,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중 일정 비율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해야만 하는 정당법 중 그 어느 것 하나 국가에서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준 것은 없습니다.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일반국민들의 의식개혁을 위해 노력했고 실질적인 불평등을 개선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제도와 법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고 유권자들은 친여성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건 후보자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학생들 앞에서 성적 농담을 던져서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서도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 교수들의 머릿통에 개념을 탑재해준 것도, 성범죄가 일어날때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수치스러워하는 현실 앞에서 언제나 피해자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것도 모두 우리 여성들이었습니다. 좀 배웠다는 사람이든, 진보적인 사람이든 우리가 먼저 일어나서 불평하고 항의하기 전에는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바꾸려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남자분들도 우리가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들도 결국엔 남자이고 여자로서 겪는 고통과 서러움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하니까요. 헌데 우리가 그렇게 싸우고 있는 동안 남자들은 뭘 했습니까? 제가 하는 말이 아무리 아니꼽고 부당하게 들려도 이것만은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우리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서, 남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훨씬 열심히 싸웁니다. 왜 남자들, 아니 병역의무자들은 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싸우는 장애인들만큼도 싸우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당신들보다 훨씬 불편한 몸과 훨씬 부족한 재산과 사회로부터 훨씬 가혹한 취급을 받고 있는 데도 싸우는 데 왜 당신들은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우리의 입을 막으려고 듭니까?



서양, 동양할 것 없이, 유럽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우리나라이든 그 어떤 나라의 그 어떤 문명권도 여성의 인권을 부당하게 착취해왔다는 죄목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종교, 이념, 풍습, 윤리, 그 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속좁고 째째하고 재수없는 늙은이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남자의, 혹은 가족이나 국가의 종속물로 만들어왔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논리에 동조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경쟁하지 않고 여자임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 하거나, 남성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나머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없어 되려 같은 여자들을 가혹하게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간피해자에게 그러길래 왜 옷을 그렇게 야하게 입고 다니며, 왜 밤늦게 조심성없이 돌아다니냐고 오히려 야단을 치는 사람들은 남자들보다 여자들 중에 더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도 싸워 왔습니다. 그 머리에 개녑을 탑재해주려고 노력하거나 그게 효과가 없으면 어서 빨리 뒈져 사라져주기를 기원했습니다. 남자들이 이제는 조금씩 여자의 고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요? 여자가 짊어져왔던 부담한 짐들을 나눠지려고 노력한다고요? 예, 그건 사실일 겁니다. 세상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온 사방에서 느낍니다. 아직도 양성평등이란, 정치적 공정성이란 이 나라에선 소수자들만의 성전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것을. 성추행당한 여성에게 그날 무슨 옷 입고 갔냐고 물어보는 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토록 열심히 싸워왔지만, 그토록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는 양성평등이라는 목표 앞에서는 어린아이 걸음마하는 수준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선진국의 여성들이 200년동안 싸워서 얻어낸 결과를 우리가 무슨 수로 50년만에 이룩해내겠습니까.



병역의 의무에 있어서 남녀는 분명 평등하지 못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남자들이 그동안 그들을 부당하게 얽어매고 있었던 징병제에서 해당되는 것이겠습니다만 국가예산이니, 외부적 위협이니 어쩌니 하는 핑계를 대며 국가가 그걸 못해주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게 핑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분명 여성들도 병역의 의무를 나눠져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는 죽어도 그렇게 못합니다. 국민으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데 어째서 그 위에 의무까지 부담해야 합니까? 비정규직 여성은 같은 비정규직 남성들이 받는 임금의 70%밖에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미혼 남성들 중 80%이상이 맞벌이하는 아내를 얻고 싶다고 하면서도 그 중 50% 이상이 아직도 가사일 분담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사일을 '도와준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을 호의로 거들어줄때나 도와준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모든 국민은 납세의 의무가 있지만 사회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세금을 아주 적게 내거나 아니면 아예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정말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수준의 의무를 짊어져도 될만큼 정당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 그 사람에 대해선 잊겠습니다. 그건 제 알바가 아닙니다. 저는 제 의견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대서 주장하면 그뿐,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에게 개념을 심어줄 의무는 없습니다. 저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곱셈과 나눗셈을 모르는 아이에게 열심히 가르치면 미적분의 개념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희망따윈 품지 않습니다. 로마인들도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난 다음에야 세금을 걷었습니다. 세금부터 내야 해방노예로 만들어주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영제국이 인도인들에게 세계대전에서 영국군으로서 싸워주면 독립을 인정해주겠다고 말했을 때, 간디는 그들이 약속을 지킬거라 믿었습니다. 돌아온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태도를 바꾼 강대국의 몰염치함뿐이었습니다. 권리를 얻고 싶으면 의무부터 이행하라는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닙니다. 지금껏 이행해온 의무에 걸맞는 대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난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만큼 돌을 던지지 마십시오. 형제니, 누이이니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은 필요없습니다. 제게는 남자형제가 없습니다. 함부로 누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 누이로 생각해서 아껴줄거라는 기대따위는 조금도 품지 않습니다. 그들와 우리는 남남입니다. 설령 가족이라 해도 개인의 이익은 충돌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근친에 의해 강간당하고 폭행당하는 지 아십니까? '가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말에 불과합니다. 말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저는 제도를 원하고 법을 원하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원합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은 제가 가져 마땅한 것이고 그 중 어느 것 하나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을 우리나라의 모든 여성들이 가졌을 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병역의 의무에 있어서 양성평등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제 겨우 걷고 있는 사람에게 날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남 잘되는 꼴 못보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심성이야 인간의 본성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알려주는 데도 못알아먹는 아둔함은 경멸당하고 무시받아 마땅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