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돈의 '안티' 들은 항상 이러한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한다. "정형돈이 줄을 잘 섰다, 이경규 라인이다, 빽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 는 것들이다. 다른 개그맨들과는 달리 왜 정형돈에게만 이런 이야기들이 더 튀어 나오는걸까.
<개그콘서트> 에서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소위 '날리던' 그가 MC로 방향을 급회전 했던 것은 분명한 모험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의 뒷배를 봐주고 있던 것이 소속사와 이경규였던 것은 분명 사실인 듯 하다. 비슷한 때에 같은 소속사였던 김인석이 같이 MC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은 이 두명을 MC로 키우겠다는 소속사의 의지가 분명했었음을 증명하고 있고, 정형돈에게는 더불어 '이경규' 라는 S급 파워가 메리트로 붙기에 이르렀다.
정형돈이 MBC로 진출하자마자 <행복 주식회사> 를 거쳐 <일요일 일요일 밤에><무한도전><느낌표> 등 MBC 메인 프로그램을 쉽사리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MBC 예능라인에서 국장급 대우를 받고 있는 이경규의 입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경규는 정형돈을 '포스트 강호동' 쯤으로 생각하고 "상상원정대" 를 비롯, 여러 프로그램에서 혹독한 'MC 수업' 을 시키며 결국 그를 회당 수백의 'A-급 고정 게스트' 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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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과연 정형돈이 실력 없이 줄타기로만 성공한 개그맨이냐 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 28, 비슷한 나이 또래 중에 스탠딩 코미디계에서 빅히트를 친 사람이 버라이어티 쪽으로 넘어와서 성공한 전례는 거의 없다. 요즘 개콘에서 그야말로 난다긴다 하는 이수근만 하더라도 <해피투게더> 에 와서는 오히려 가수 출신인 이효리보다도 못한 실력을 보여줬었다. 그것은 일주일간의 아이디어 준비로 완성된 무대를 내놓은 스탠딩과는 달리 버라이어티가 애드립과 순간적인 재치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박준형, 정종철, 김시덕, 이수근도 실패한 버라이어티 진출을 정형돈은 나름대로 성공리에 정착했다. 이는 단순히 이경규 '빽' 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초기 버라이어티 쇼에서 게스트 또는 보조 MC로 활약한 그의 모습을 보면 지금과는 달리 상당히 공격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실패한 자들과는 다른 '범상치' 않은 측면이 있다.
이처럼 한때는 "정말 나댄다, 정말 오버한다." 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던 정형돈이 왜 최근들어 "말이 없다, 웃기지 않는다." 는 혹평을 받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최근의 상황을 보고 "실력없다" 는 섣부른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평가와 다르다.
우선 정형돈이 초반에 비해 많이 차분해지고 이야기의 맥을 짚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그의 달라진 모습을 감지하게 한다. 예전 <상상원정대> 때, 이경규와 함께 진행을 하면서 정형돈은 '오버한다' 는 이유만으로 이경규에게 많은 꾸지람을 들었었다. 그 때문에 힘들어서 많이 울기도 했다는 정형돈을 두고 이경규가 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가' 만이 할 수 있는 통찰력 있는 충고였다.
"신인 개그맨들이나 스탠딩 개그를 하던 사람들이 버라이어티 쪽에 나오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오버를 하는 경향이 있다. 스탠딩과는 달리 버라이어티 쪽은 방송의 흐름을 타야하는데 남들보다 눈에 띄어야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나와야한다는 그들의 강박관념이 오히려 분위기의 맥을 끊어버린다.
그런 조급증은 정형돈이를 비롯해 지금 스탠딩 코미디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인데 그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제' 가 필요하다. 말하고 싶어도 참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때도 있어야하고 끼어들고 싶어도 마무리되는 분위기면 스스로 정리할 과단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상상원정대> 이전과 이 후, 정형돈이 변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처음에는 몸을 이용한 슬랩스틱 코미디로 무조건 들이대며 웃길려고 노력했던 그가 <상상원정대> 이 후를 보면 남에게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제하는 모습과 함께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내가 보기엔 놀라운 변화요, 발전이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말 한마디에 끊겨가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화제가 자연스럽게 넘어가기도 한다. 정신없이 말하며 웃겨대는 하하, 노홍철, 박명수 사이에서 유일하게 유재석에게 어시스트 해주는 인물이 정형돈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화제와 분위기를 '읽어내고 있다' 는 것이고 웃기지도, 튀지도 않지만 진행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상플러스에서도 마찬가지. 정형돈이 던지고 이휘재가 터뜨리는 식. 대표적인 예가 김수로 꼭지점 댄스였다.)
초기 <무한도전> 을 보면 정형돈이 애드립치는 시점에 유재석이 화제를 돌리거나 다른 분위기를 유도하고는 했다. 더 하려는 정형돈과는 달리 분위기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유재석의 노련함은 매 순간순간마다 '정형돈과 레벨이 다름' 을 입증하고는 했는데 최근의 경향을 살펴보면 유재석과 정형돈의 분위기 감지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유재석처럼 분위기를 단박에 역전시키고 완급을 조절하며 앞으로 끌고 나가는 뛰어남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버해서 나선다거나 분위기 조절에 실패하는 확률은 낮아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탠딩과 MC의 차이점이고, 정형돈을 이러한 스타일을 아주 잘 배워나가고 있다.
여의도 통설에 따르자면 메인 MC로 나서기 위해서는 기본 5년 이상은 고정 게스트로 머물러야 한다. 유재석은 그 기간이 10여년에 이르렀고, 김용만도 김국진의 서브 역할로 오랜기간 숨죽여 왔다. 강호동이 특급 MC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천생연분> 때 부터였고 그 이전에 강호동은 그저 '천하장사 출신' MC에 불과했다.
그만큼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진행 스타일, 자신의 개성을 만들기 힘든 것이 바로 버라이어티 MC인 것이다. 이들에 비견해 볼 때 정형돈의 행보는 하향곡선이 아니라 천천히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상향곡선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MC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2~3년 밖에 더 되는가. 내가 보기에 정형돈은 아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이상으로 그에 대한 변명을 마치려고 하는데 그 전에 몇가지 충고를 해야겠다.
첫번째, 발성. 연기자만 발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MC도 발성이 필요하다. 임성훈, 정은아 같은 전문 MC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차분함과 진지함이 있고 이경규, 유재석, 신동엽 등은 남다른 목소리와 주위를 압도하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에비해 정형돈의 발성은 형편 없을 정도.
조금만 목소리가 커져도 안으로 뭉그러져가는 바람에 정작 애드립을 날려도 자막이 아니면 묻힐 때가 많다. 쓸만한 이야기들도 자막처리가 안되면 분위기상 흘러 내려가기 때문에 발성은 캐릭터로 승부를 보든, 발성법을 바꾸든 처절한 노력이 선행되야 할 듯 하다. 끝까지 그 발성이라면 그는 'MC' 로 대성하기엔 힘들 수 있다.
두번째, 욕심. 욕심 자제는 정형돈에게 필수다. 물론 기획사 빨이 크겠지만 그가 맡았던 프로그램이 그의 그릇보다 항상 넘치게 큰 프로들이다 보니 능력의 한계가 분명하게 보인다. 내 생각엔 <행복 주식회사> 가 스타일을 익혀 나가기에는 가장 좋았던 것 같은데 이 후에 맡았던 것들이 너무 대단한 프로그램들이다 보니까 오히려 뒷통수를 맞은 격.
요즘보면 <느낌표> 에서 조혜련, 서경석 등 당대 최고의 MC들과의 앙상블도 꽤 괜찮은 듯 싶은데 이렇게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 과감하게 <상상플러스> 에서 하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상상플러스> 에 있는 것보다 <무한도전> 캐릭터에 신경을 쓰는 편이 그에게는 더 이익일 듯. 같은 날에 촬영이 있다보니 펑크도 심하고 기력이 쇠한 듯한 느낌이다.
그의 인생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 버라이어티에 진출했으나 '실패' 한 개그맨, 스탠딩에서 시작해 뛰어난 MC로 자리잡은 개그맨. 과연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6대 MC(이휘재까지 치면 7대 MC)가 꽉 잡고 있는 예능라인에 정형돈으로 하여금 새로운 개척점이 생겼으면 한다.
열심히 배워가고 있는 정형돈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충고와 격려, 그리고 때로는 가슴 아프게 할 날카롭지만 애정어린 비판이 아닐런지. 부디 그가 좋은 MC로 성장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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