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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2일 목요일

[펌]동감100%:북한이 미사일을 쏜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란 것이 어느 정도가 될런지는...
미국과 일본이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것은?..
북한이 진짜 쏠까봐?..
절대로 NO!!
지들이 더 잘안다..
이것은 대북 압박용도 되지만 한국 압박용이기도 하다..
우리 보수진영이나 순진한 국민들은 북한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분노한다..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진짜 더 위험한 나라는 일본과 중국이다..
단순비교를 해보라..

우리가 북한을 이기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군사력을 제외하면 우리와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 군사력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스스로 가능하다..
물론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우리도 미국을 어느정도 이용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을 놔두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이것을 절대 반기지를 않는다..
미국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며 중국, 러시아까지 견제를 해야한다.
일본도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해야할 처절한 무언가가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면 일본은 당장 중국, 러시아와 심각한 마찰이생긴다.
특히 영토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배경을 무기로 중국, 러시아와 힘겨루기를 하고있다.
일본만 홀로남는다면?..
바로 그순간 깨갱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상대로 오만방자함을 극도로 펼치는 것도 미국때문이다..

그럼 일본과 미국은 계속 현재 한반도 상황을 유지시켜야 자국에 이익이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이 화해 모드로 간다..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미국도, 일본도 짜증나고 불안하다..
그러니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만만한 것이 북한이다..
계속 압박하고 물고 늘어진다..
긴장을 고조시켜 국내 보수파들을 자극시킨다..
김정일을 건드려서 무력시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 명분이 이라크내 민주화와 대량살상무기 아닌가?
대량살상무기는 코메디로 끝났고..
민주화...지구상에 독재나 비 민주화 국가가 한 두군데인가?
중국도, 쿠바도, 아프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국가들..
그런데 왜 하필 이라크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안다..(우리나라 보수진영 빼고)

북한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절대 남침 못 한다..
자살골을 먹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편먹고 북한을 조종해서 미국, 일본 연합군과 죽기살기로 전쟁을 치룬다는 계획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은 곧 전쟁이라도 날것처럼 난리다..
가증스럽고 한심스럽다..

한미 FTA가 진행 중이다..
한국 준비가 만만치않다..
미국이 최대한 이득을 챙기려면 무언가 무기가 있어야한다..
바로 북한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독도문제, 신사참배, 약사왜곡, 중국과 영토분쟁 등등..
무언가 돌파구가 있어야한다..
무엇보다 한반도가 긴장이 되어야 일본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마음만 먹으면 우리힘으로 억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늘 군사력등이 북한보다 뒤진다..
미국 때문이다..
자주국방 하는 순간 미국은 집으로 가야한다..
그러니 미사일 개발도, 핵무기 제조도, 핵연구도...
비행기나 무기도 미국것을 사야한다...
군사력 식민지나 마찬가지다..
그러고는 미국아니면 한반도 평화는 깨진다, 북한이 미사일 쏜다, 핵무기 쏜다, 한국은 초토화 된다라는 위기감을 퍼뜨린다...
우리의 참전용사분들, 무슨 동지회, 보수진영들은 미국 가지마라고 아우성이다.
그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희생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소...
우리도 우리 목소리를 내야할 때입니다....

절대 부화뇌동 하지 맙시다..
북한을 무조건 믿자는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아직 위협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위협적인 이유는 반드시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미국, 일본은 즐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만 죽어라 이용당하고 알면서도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일본이 북한보다 더 위험한 적입니다..
북한은 자살하는 심정이 아니면 절대 행동으로 못 옮깁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은 여차하면 가능합니다.
미국이야 두말 할것도 없고 일본도 분위기를 보다가 북한이 위협적으로 나오면 미국에게 양해를 얻어서 바로 치고들어갑니다.
그리고는 한반도는 미국과 일본이 양분합니다.
북한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이 중요한데 미국과 맞설지는 의문이죠..

긴장을 풀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일본, 미국의 쑈에 놀아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북한을 찬양하고 믿고 손을 잡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도둑 잡으려다 희대의 살인마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꼴이 생길지도..

이글을 보면 보수주의 분들은 또 엄청 욕을하겠죠..
빨갱이가 어쩌고 하면서...
그 분들은 나중에 한반도가 통일되고 평화가 찾아오면 이땅에 살수가 있을런지..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고 목소리를 키웁시다...
제발 무조건 미국 시키는대로 하지만 말고...
그리고 3.1절에 미국만세 외치는 우울한 일이 없도록...
유관순 누나가 "내가 그딴 소리를 들으려고 목숨을 바쳤냐?"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북한을 누르고, 제압하고 평화를 지키자는 뜻으로 적은 글입니다.
어느 한쪽의 말로 갈팡질팡 하지말자는....

 

 

 

 

 

원문: http://agorabbs1.media.daum.net/griffin/do/debate/read?bbsId=D104&articleId=32251

 

2006년 6월 11일 일요일

[펌]아리랑이 게이샤의 전통음악이라고?

 

우리나라 전통음악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음악이 바로 '아리랑'이죠??

근데 우리의 아리랑의 한 앨범에서 일본 게이샤의 전통음악으로 수록되어 있어서

외국 음반사이트에서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의 사이트는 'audiolunchbox.com'이라는 곳으로 우리나라 유료 음악사이트 같은 건가봐요..

 

9번 트랙의 '아리랑'이 보이시죠??

이건 아리랑이 아닌 다른 노래가 나오구요..

10번과 21번을 들어보시면 아리랑이라는 걸 아실수 있을꺼예요..

 

 

앨범 리뷰인데요...

여러 누리꾼들이 아리랑은 일본곡이 아닌 한국의 전통음악이라고 강조하고 있네요..

 

 

 

 

이 노래는 http://www.oldies.com/product-view/ZZB441.html/ 에서 5.97달러로 판매까지 되고 있던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펌)일본해군이 충무공에게 배워간것은? 대략충격

고고고님이 아고라서 퍼온 <이순신장군과 배용준>을 읽고 아고라 토론방베스트에서 퍼온 챔피온님의 글입니다. ^^;뿌듯!

나머지 2편의 글도 좀전에 퍼왔으니 보세효~ 으쓱~으쓱~

 

<일본인이 이순신을 묻는다면(1)>

몇달 전 일본 동경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입니다.
일본에서는 4년 정도 있었구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식당, 유흥업소 서빙 등등
안해본 게 없습니다.

한번은 일식당에서 서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민망하고 부끄럽고 죄스럽기까지했던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겪었던 그때의 경험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을 가리켜 족보도 전통도 없는 민족이라
말합니다. 일본이 오늘날 경제대국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저 남의 것을 잘 베끼는 능력 때문으로 폄하해 버리기도 합니다.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훌륭하든 보잘 것이 없든 그것을 받들고 존중하고
계승해 나가려고 하는 자세만큼은 세계 제일의 수준이라고
봅니다.

일본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들을 지나다 보면
조상으로부터 3대, 5대, 심지어는 10대에 이르기까지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알바를 했던 일식당 사장님(주방장) 역시 3대째 식당을
경영해오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원래는 사장의 형님이 가업을
물려받아 식당을 경영했는데 12년 전 형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가업을 잇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식당을 명퇴를 당했거나 할 것이 없을 경우
"만만한 게 음식장사"라는 생각에서 식당을 하거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죠.

저도 일본에 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장은 명문 게이오대 출신으로 글로벌 기업 소니사의
일원으로서 남부러울 게 없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모습(작고 왜소하며
안경을 쓰고 뻐드럭니로 인해 입이 튀어나온... 절대 그 분과
일본인을 비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이었죠.

저도 사장의 이력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됐죠.

열달 좀 안됐네요.
식당 문을 닫을 무렵이었는데 사장이 불쑥 역사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것도 임진왜란에 대해서요.
그렇다고 했죠.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전 관심 정도가
아니라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쪽이었습니다. 특히 전쟁사, 영웅전기 같은
책들을 많이 봤었고, 그래서 사장의 물음에 대해
속으로는 "일본의 역사도 아마 당신보다 내가 더 많이 알 걸"이라고
생각했었고요.

내가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사장이 다짜고짜 "이순신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하더군요. 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게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저는 사장이 어디서 이순신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얼마든지 대답해 줄 용의가 있었죠.
밤이 새도록 말이죠. 그래서 그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술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거북선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느냐, 복원은 언제 되느냐"고
하더군요.

질문을 받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핵심 해전술?"
"거북선의 복원?"
뭐 하나 제대로 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질문 외에도 바로 이어서 몇 가지가 더 있었던
것 같았는데 너무 당황했던 나머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이 제 입장이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답변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또 그 답변이
정답이고 오답이고를 떠나서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저처럼 당황해 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전술에 대해서야 누구라도 학익진이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합니다만, 그 전술의 원리, 그리고
그 전술이 해전장별로 어떻게 응용되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하실 수 있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거북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저는 거북선이 2층인지 3층인지,
머리가 유황을 뿜는 굴뚝용인지
대포를 쏘는 포탑용인지
선수 하단부체 충돌용 돌기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날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순신에 대해서라면 이를 갈며 증오심과 적개심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했던 일본인을 통해서 제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을
알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사장은 나에게서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해 주더군요.

"이순신은 중세기 세계 최강의 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군을
꺽었다. 만약 이순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그 군력으로
중국은 물론 아랍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정신과 해전술은 우리 근세 일본해군의 동력이 되었다.
생각해 보라. 임진왜란은 조선과 중국 대 일본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순신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고 말이죠.

사장은 어렸을 적부터 일본 전국시대를 풍미한 영웅전기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군요(사실 일본사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특히 전국시대 3대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일본인들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인물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우익과 성인남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일본이 개국한 이후, 처음으로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눈을 돌린 인물이기 때문이랍니다.
아울러 평민출신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점도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줬겠죠.

사장은 대학시절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다의 맹장들이 왜 하나같이 맥을 추지 못하고 연거푸
패해야 했는지, 천하의 용장들이 총출동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해야 했는지....
일본 자위대는 물론 정계의 정점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는
무엇 때문에 이순신을 칭송했는지.... 말이죠.

관련 서적, 논문 같은 것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고 하더군요.
일본인의 시각으로는 아무래도 연구에 한계가 있지 않겠냐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한국인은 세계적인 영웅을 배출한 민족이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구현해 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일본에서 배출되었다면
징키즈칸 못지않은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되었을 거라면서....


그날 숙소에 돌아온 저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죠.
그리고는 서울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좀 사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형님이 보내주신 몇권의 책이 왔습니다.
소설류에서부터 해전에 대해 기술해 놓은 전문 서적류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그런데 공허해 지더군요.
너무 막연했고 황당했으며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또 이미 알고 있던
얘기들이었구요.

그리고 한달 전,
금년 5월에 나온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울면서 봤습니다.
새로운 사실들, 그리고 지금껏 그 어디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얘기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책의 머릿글을 보니 작가들은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20년이 넘게
집필에 전념해 왔다고 하더군요. 어떤 분은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두면서 말입니다.

또 서문에는 사카모토 사장이 제게 물었던 이순신의 해전술의 원리와
거북선의 실체를 밝혀주는 글이 들어 있었습니다. 전율을 느끼며
책장을 넘기고 넘겼죠. 거짓말 않고 꼬박 밤을 세워 1권의 반을
읽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까지 나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도대체 제도권 교육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은 무었이었을까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말로는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문화민족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교육이 문화민족의 일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던 것일까요.
대한민국의 해군과 군사학회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배웠던 교육이
12000원 짜리 단행본 1권보다도 충실하지 못했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 서문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이것이 많은 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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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지각변동을 가져온 충무공의 해전원리

20세기 일본 해군은 직충(直衝,ramming) 등을 오역하지 않았기에 충무공의
'거북선+학익진의 해전원리'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은 20세기 초 세계사의 지각변동을 가져온 청일해전과
러일해전에서 승리했고, 한반도는 일본에 합방되었으며,
청나라와 러시아는 차례로 문을 닫는다.
그 후 일본 해군의 학익진(丁자진) 해전원리를 승계한 영국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해군을 분쇄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 해군이 레이테만(스리가오)에서 학익진(T자진)으로
일본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켰다.
미국 해군의 학익진 원리에서 맥아더의 (도쿄를 향한)
개구리 뜀뛰기 상륙작전과 란체스타 공군전술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서적에서는 세계 해군들의 학익진 연구사가
빠져 있기에 지금까지 우리의 이순신 연구는
우물안 수준에 머물러 있음이다.


 

 

<일본인이 이순신을 묻는다면(2)>

얼마 전, 「일본인이 이순신에 대해 묻는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사람입니다.

두서없이 정리되지 않은 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신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며칠 전 댓글을 통해 말씀드린 대로
제가 왜, 무슨 이유로 보잘 것 없는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소개하게 되었는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왔을 때 TV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더군요. 관심을 가지고 시청했죠.

종영이 임박한 상태라 마지막 몇 회 분만 볼 수 있었습니다.
넋이 빠져나갈 정도로 훌륭한 드라마였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 역을
맡아 열연하신 김명민님의 연기는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께서 전사하시는
장면(마치 의도된 죽음임을 암시하는 듯한)은 짧았지만 그동안
이 드라마를 애청하며 허전한 가슴을 달래던 저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주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장군께서 갑옷을 벗으시고 함교 아래로 내려오셔서까지 위험을 자초하실
이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드라마라 하더라도
매우 지나친 설정이었다는 게 노량해전 편을 본 저의 소견입니다.

창작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적극 권장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창작은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제일의 해군제독,
필승의 해군 제독의 명성과는 결코 어울리지 설정이었습니다.
때문에 적어도 불멸의 이순신 노량해전 편에서 만큼은
이순신 장군은 없었다고 봅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전사 장면은 상식(장군의 인품)과 이치(병법의 이치)를
고려하지 않은 실수에서 빚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장군님에게 노량해전은 이기기 위해 혼신을 바쳐 출전하신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드라마에서의 설정이
창작이 아닌 400년 전, 노량해전장에서 있었던 실제의 사실이었다면

임진왜란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거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최고 지휘관의 죽음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병법의 이치대로라면 전사하셨어도 전사하지 않으셨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순신 장군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십니다.
그런 분이 병법의 이치에 역행하는 일을 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기기 위해 출전하셨다는 것이죠.

자칫 이야기가 논점에서 벗어날 소지가 있을 것 같아
혹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심난한 기분에 불멸의 이순신 게시판에 올려진 다른 분들의
글을 보다가 저는 아주 감명 깊은 글 하나를 보게 되었죠.
김세명이란 분이 올린 글인데요, 이 글이 바로 저로 하여금
이곳 토론방에 글을 올리게 만들었고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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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 2005/08/30 22:28  작성자 : 김세명 ()
제목 : 한국인의 필독도서..이순신과임진왜란

20년을 넘게 충무공에 관해서 연구한 성광수님을 위시한 회원들이 낸 총4권인데
현재 2권까지 발간이 되있읍니다.. 성광수님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시고
이순신역사연구회를 이끄시고 계시더군요...책 내용의 깊이는 정말 최고입니다..
여태껏 나왔던 허접한 김탁환의 불멸하고는 비교가 안되게 충무공과 임진왜란에
대해서 적었더군요...보니까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연구회 사정이 무척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여러분도 구입하셔서 꼭보세요..이런 연구회가 재정난 때문에
사라진다면 그건 대한민국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에게 친구에게 선물해도 돈아깝지 않은 최고의 불멸책입니다..
-불멸의 이순신 시청자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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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신 님들의 소감은 어떠신가요.
전 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더군요.
짧고 투박해 보이는 글이었지만 저는 김세명님이란 분의 글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강한 외침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책을 구입해 밤새워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려고 읽은 것이 아니었죠. 보는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엄청난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상식의 틀은 부서졌고
그 자리에 자랑스럽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식과 체험,
그리고 새로운 임진왜란 해전사가 꿈틀대기 시작했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가 알고 싶었던 것,
사카모토(식당 사장)로부터 받은 의문부호들이
비로소 느낌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서
징비록을 통해서
소설들을 통해서
전문서를 통해서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의문들이
이 책을 통해서 거의 한꺼번에 해결되었죠.
어떻게 보면 이점이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속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한 큐로 꿰뚫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책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독자가 아닌 장군이 이끄시는
조선 함대의 일원이 되어 남해안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때로는 해상 숙영지에서...
때로는 격랑의 바다 위에서 기동하며....
때로는 적을 맞아 싸우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이나 책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장감을 이 책은 너무도 실감나게 보여주었죠.
태산과 같은 감동이 파도를 타고 가슴으로 가슴으로 사정없이
부닥쳐옵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진짜 파도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전율을 느끼게 될 즈음 저는 불현듯
이런 자문을 하게 되었죠.
“왜 이런 책이 이제야 나왔을까?”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알았던 것들은 뭐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저는 머리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죠.
작가분들이 회고하듯 써놓은 두 페이지 분량의 기록에서 말입니다.
몇 대목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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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내기까지 2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은
책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필자들에게는 충무공을
닮아가기 위한 실천적 여정이자 깨달음의 장이기도 했다.
충무공을 연구하면서 크게 느낀 점이 있다면 우리의 모습
속에도 이순신과 같은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다.
충무공의 말씀(언어, 글) 속에서 이러한 닮은 모습을
스스로 찾아내고 자율적으로 계발해 간다면 독자들 또한
값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내는 필자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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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금년 5월에 나온 책이구요.
그러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책이었죠.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알았던 지식들은 충무공의 말씀(언어, 글)이 아닌
대개가 작가나 학자분들의 시각에서 쓰여진 주관적인 기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철저하게 이순신 장군의 기록(난중일기, 장계)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작가의 상상과 추론이 아닌
어디까지나 장군의 시각에서 임진왜란의 역사를 탐방하듯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작가들은 역사 탐방을 위한
안내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죠.

제가 처음 올렸던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어떤 분들은 제가 식당 사장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해서
부끄러워한 것으로 아시더군요.

왜 그것도 몰라서 답변을 못했느냐는 질타와
전문적인 분야이므로 모를 수도 있다는 동정,
중요한 것은 충무공의 정신이지 그같은 물리적 결과물은
중요하지 않다는 반박의 말씀까지.....

물론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가 미처 설명 드리지
못했지만 그날 전 사장을 통해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도고의 일본 해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배워간 것은
해전술(소프트웨어)이나 거북선(하드웨어)만이 아니라는 거였죠.
이순신 장군의 해전술과 거북선 속에는 장군님의 철학과 정신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도고의 일본 해군이 배워간 것은
‘소프트웨어+하드웨어+이순신의 철학/정신’이라는 겁니다.

190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도고를 방문했을 때
생도들이 도고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각하께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누구입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도고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16세기 조선왕국의
이순신 제독일세. 그 분의 무훈과 인품을 따를만한 제독은
아직 없네.”라고 했다는 일화는 다들 아실 겁니다. 

도고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일본인 특유의 겸손, 겸양의
덕목이 발휘되었을 뿐이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하셨는데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도고가 이렇게 발언한 때는 을사보호조약(1905년)이 있은
다음해였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은
아시다시피 일제가 “조선은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으므로
일본이 보호해준다”면서 강압적으로 맺은 조약입니다.

천하의 도고라 하더라도 그러한 미묘한 시점에서
그러한 발언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도고는 진심으로 이순신 장군의 ‘무훈과 인품’을 존경했고,
그것을 학습했을 거라는 것이죠.

전에 말씀 드렸듯이 도고는 현재 일본 자위대와 정계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군국 영웅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이순신 장군을
대놓고 칭송했구요.

사카모토 사장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순신의 정신은 오늘날 일본 속에 살아계시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뼈져리게
부끄러웠고, 죄스러웠고, 민망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함대에 참패한 일본-
300년 후 일본 해군의 이순신 연구-
일본의 청일/러일해전에서의 승리-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그저 역사의 아이러니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되새겨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정신력 자본, 우리의 지식자산이
남의 나라에 유출되면서 빚어진 통한의 역사인 것입니다.


학익진과 거북선은 그냥 지식으로 알아서 해결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속에 충무공의 혼과 정신이 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5천년 문화민족의 자긍심과 역량과 민족의 혼이
응집되어 완성된 정신력 자본의 총화라는 것입니다. 

김세명님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셨겠지요.
그 글은 저를 움직였습니다. 저의 글 또한
다른 분들에게 어떤 외침과 울림으로
작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글을 올린 이유입니다.


이야기가 또 두서없이 전개되었네요.
제 글에 욕설이나 비방 모두모두 환영합니다.
공감은 아니더라고 그러한 교감만으로도
저는 큰 에너지를 얻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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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글에 대해 빚어진 오해와 의혹들에 대한 저의 이번 해명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시간이 없어서 짧게 말씀드리고 그래도
충분하지가 않다면 다음에 다시 글 올리겠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먼저 책홍보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이번 글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설명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많은 논쟁의 빌미가 되었던 '챔피온이 존경한건 충무공이
아니라 일본인 사장인가?'라는 의혹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부족한 저의 표현력 때문에
생긴 오해였던 것 같습니다. 카아악툇엣님을 비롯한 많은 님들께
이 짧은 답변이 먹힐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심이라는 것을
믿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번째, '일본군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러한 군세로 중국은 물론 아랍까지 쳐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
챔피온의 소견인지 아니면 일본인 사장의 생각인가?'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럴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뿐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일본인 사장님의 얘기를 듣고
그럴수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 것이구요.

네번째, 이순신 장군님의 전사와 관련된 저의 소견 부분인데요...
이것은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군요. 며칠 안으로
못다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관심 많이 가져주시길...


짧지만 일단 이 정도로 저의 답변을 마무리하죠. 잠깐 짬이 나서
인터넷을 보다가 로긴 하고 글을 남깁니다.
모두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일본인이 이순신을 묻는다면(3)>

“일본인이 이순신에 대해 묻는다면?” 세 번째 글입니다.
두 번째로 올린 글을 통해서 님들이 가지고 계신 오해를 풀어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전의 댓글들을 자세히 보니
식당 사장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 같군요.
글 한번 잘못 올렸다가 욕먹어서는 안되는 분이 욕을 먹게 된것같아
해명 차원에서 다시 글을 올립니다.

적지 않은 분들께서 일본인 사장의 의도가 자신들의 침략근성을
무마하고 본질을 흐리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생각하셨던 것 같네요.
하지만 사카모토 사장은 님들이 생각하시는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진심으로 충무공을 존경했고
그 인품에 감화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이 왜 세계인, 특히 동아시아 3국(한국, 일본, 중국)의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아야 할 인물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뚜렷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 일본인들만은
장군의 업적과 장군으로 인해 수습된 임진왜란이라는 역사를 통해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이순신 장군이 아니셨다면 도쿠가와 바쿠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문치시대(평화의 270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을 통해서 얻은 값진 교훈의
결과물이었다. 누가 감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꺾을 수 있었겠는가?”

사카모토 사장이 한 말입니다. 100년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일본인들의 삶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인해
또다시 짓밟혔지만 히데요시의 꺾일 줄 몰랐던 야욕이
이순신 장군이 지킨 바다에서 수장되어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 덕택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잡을 수 있었고,
일본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왔던 문치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고 말이죠.

히데요시 사후(사장은 화병으로 죽었다고 보더군요. 최고의 지략가였고
수싸움에 있어서는 거의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히데요시 입장에서도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수를 넘어서기는커녕 읽을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마음의 응어리가 화로 전이되었다는게
일본 역사학계의 시각이라네요. 한산도해전에서 사실상
끝장이 났다고 해요. 그런데 이순신의 수를 읽지 못한 조선의 조정과

반 이순신 세력들이 작당해 장군을 감옥에 가두는 패착을 두면서

꺼져가던 히데요시의 야욕이 살짝 되살아났다고...)

히데요시 파의 다이묘들에 맞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축으로 한

반 히데요시 파의 단판승부가 펼쳐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고 도쿠가와 막부를
세우게 되죠. 이순신 장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키가하라 전투 같은 건 있지도 않았을 거라는게
사카모토 사장의 견해입니다.

사장은 이에야스를 일본의 역사 인물 중 아주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하더군요(일본 성인 남자들의 대부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경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카모토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번 글에서
이것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거 같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소 놀라웠습니다. 흔히 이에야스를 말할 때
인내, 용이주도함, 냉정함... 일본에서는 뭐 이런 덕목과 처세들을
이야기 합니다. 또 그런 것과 관련된 서적들도 아주 많구요.
그런데 사장이 이에야스를 존경하는 이유는 정말 뜻밖이었죠.

“그(이에야스)는 단순한 사무라이가 아니라 역사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히데요시의 칼이 이순신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고 거기서 큰 교훈을 얻었다. 그 결과 피의 시대가
종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의 리더들은 그 역사를
진지하게 분석하기는 했지만 존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결과 여러 나라에 씻지 못할 죄를 지었고 일본에게도 파국을 가져왔다.”

사장이 울분을 토하듯 제게 한 말입니다.
이제 사장에 대한 오해는 풀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그날 사장으로부터 들었던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해전술과 거북선에 대한 질문으로 제가 당황해했다는 얘기는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아주아주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 게 있습니다.
저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저는 거북선을 돌격선, 혹은 특수 임무를 수행한 다용도의 전술무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사장은 거북선을 일컬어
인류 역사상 위험관리(방지) 시스템이 구현된
최고, 최상의 모델이라고 하더군요.

때문에 일찍이 일본과 서구의 군관계 연구소나 기업체들에서는
거북선을 리스크 매니즈먼트(Risk Management)의 표상으로 보고
많은 연구들을 해왔다고 합니다(첫번째 올린 댓글들 중에도 어떤 분께서
비슷한 말씀을 써놓으셨더군요. 그런데 그 댓글을 쓰신 분의 말씀처럼
거북선은 단지 보험회사에서만 연구되었던 게 아니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일본의 경우는 이것을 많은 기업들이 기업 경영전략의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 경영의 차원에서도 연구를 해왔다고
해요(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장 자신도 들은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나중에라도 우리가 꼭 한번
알아봐야 할 분야인 것 같습니다).

태평양전쟁 때는 거북선이 선제 기습공격의 수단, 즉 카미카제로
응용되었답니다. 카미카제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자살특공대가
아니라는 거죠. 카미카제는 공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있었는데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 조직이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유인(1인용) 어뢰정(그 자체가 폭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미군의 항공모함이나 군함으로 돌진해서 일격에 침몰시켰다고 해요.
거북선에 철저히 농락당한 왜군의 역사를 일본 군부가 미군을 상대로
그대로 써먹은 거죠. 왜군들에게 거북선이 공포의 대상이었듯이
미군들에게도 이 어뢰정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답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진주만 공격도 이순신 장군의 정박중인 왜선단에 대한
신출기몰했던 기습 선제공격전략을 응용한 것이랍니다).

그런데 사장은 여기서 하나 중요한 지적을 하더군요.
이순신의 거북선 수병들은 똑같은 돌격대였지만 안전한 여건 속에서
싸웠던 반면, 카미카제 요원들은 그야말로 자살 특공대였다는 거예요.
일본이 이순신을 연구한다고 했지만 결국 성웅의 면모,
진정한 리더의 면모만은 모방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순신 장군은 진정으로 위대한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이순신 장군께서는 평소부터 필사즉생이 실천되고 체험되도록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런 체험을 한 병사들은 최강의 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출전하면 죽는 것이 아닌, 반드시 이긴다는 체험....
사카모토는 이 대목에서 얼굴이 붉게 상기될 정도로 힘을 주어 말하더군요.

“이것이야 말로 정말 위대한 승리가 아닌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사가 걸린 전장에서 그같은 리더십이 발현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백전백승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승리를 보장해준다는 그 시스템의 철학!”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국도 역사를 존중했다면
이순신 장군을 통해서 많이 배웠을 것이고,
그랬다면 일제 식민통치같은 역사는 없었지 않았겠냐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좀 이해가 안됐는데 재차 설명을 듣고서야
깜짝 놀랐습니다. 국가 경영을 위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시켜도
시원찮을 판에 왜 한국은 리스크 매니즈먼트의 상징인 거북선을
아직까지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거였죠.
일본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대단히 잘못되었지만 한국도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거북선의 실체에 대해서조차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판에...
저는 일본인으로부터
‘거북선=리스크 매니즈먼트’,
‘거북선=국가 경영을 위한 시스템적 응용’이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죠.

왜 제가 그런 말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들어야 합니까?
왜 한국은 역사를 존중하지 않느냐는 소리까지 곁들여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쪽발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욕하고 의심하기 전에 이 쪽발이의 말을 이제라도
깊이 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그날 전 너무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형님에게 이순신에 관한 책들을 부탁했고 거의 두달동안
취침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10권 정도를 봤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돼서 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다가 귀국해서 김세명님이 쓰신 <불멸의 이순신>
게시판 글이 계기가 되어 <이순신과 임진왜란> 책을 보게 되었구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 책에서 제가 가진 감정은 감동보다는
놀라움이 먼저였습니다. 책을 펴는데 머리글 첫 문장에
‘필자는 삼성화재해상보험 재직시 해상보험의 시각에서
거북선을 연구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거예요.
순간 기절하는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거북선 편에서는
사카모토 사장이 저에게 말한 리스크 매니즈먼트에 대한
설명이 나오더군요.


해방 후 반세기....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고 어떠한 진척이 있었을까요.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구한말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무엇입니까?
그때는 세도정치같은게 문제였다면 지금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왜 다른 나라에 가서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왜 그러한 사실을 무명의 아마추어 작가분들이 썼다는
책에서 알아야 하나요.

해마다 충무공 탄신일이 되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똑같은 분들이 모여서
그렇게 논쟁만 하다가 끝냈죠. 그걸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합니까.
왜 충무공의 은둔설이 나오며, 왜 자살설이 나옵니까.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할 것은 뒷전인 채 왜 그런 얼토당토않는
것들에 매여서 시간을 허비합니까.

왜 원균이 충무공의 라이벌로 등장하고,
왜 거북선은 아직도 실체 규명이 안되고 있는건가요.
적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는
그 용맹했던 거북선은 어디 가고
목아지가 길어 슬픈 사슴의 모습으로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우스꽝스런 거북선들은 대체 무엇입니까.

충무공학(學)은 국민의 학(學)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력자본이며,
위대한 지식자산이기 때문입니다.

 

 

퍼나르기 끝...

이글 퍼나른거...지금까지 제가 한일들중에서 가장 잘한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PS

다보셧습니까?

그럼 맨 밑에 <싼초>님이 답글로 달아놓은 <노량해전...>도 읽어보세효^^

오늘(11월 19일)이 바로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바로 장군님이 순국하신 날이라네요.

http://bbs2.worldn.media.daum.net/griffin/do/koreawave/read?bbsId=K005&articleId=31&pageIndex=10&searchKey=&searchValue=

 

 

*PS

오랜만에 와보니 새론 답글들이 많네효^^

이것도 함 보세요. <스크린쿼터사수>님이 최근에 여기 한류방에 올리셨는데 강추합니다.

http://bbs2.worldn.media.daum.net/griffin/do/koreawave/read?bbsId=K005&articleId=358&pageIndex=2&searchKey=&searchValue=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사이언스, 25가지 난제 선정

사이언스, 25가지 난제 선정
우주탐사선이 소행성을 명중시키고 인위적으로 만든 배아 줄기세포가 난치병 치료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지만,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세상의 비밀은 아직도 너무 많다.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자신을 ‘진리의 대양에서 매끈한 조약돌을 찾으려는 소년’에 빗댄 것처럼, 과학자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수수께끼 투성이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는 창간 20주년 기념으로 현대 과학자들이 너무도 해결하고 싶어하는 과학적 질문들을 정리했다. 사이언스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선정한 25개 질문들은 인간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사실은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각 분야의 도전 목록이다. 이 중 흥미로운 주제들을 뽑아 정리했다.

▦우주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우주 95% 구성 암흑물질 아직 존재조차 확인못해



우주는 중력의 힘에 비해 너무도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5%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암흑 에너지’, 보이지 않는 물질들은 ‘암흑 물질’이라고 일컬어진다. 우주의 95%를 구성하는 이들 물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전 세계에서 지구 근처를 떠도는 암흑 물질의 흔적을 찾으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눈에 띄는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고병원 교수는 “암흑 물질을 찾아내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벌레가 내는 미미한 소리에 의존해 벌레의 존재를 알아내려는 것과 같다”면서 “암흑 물질의 성질이나 질량, 그 상호작용의 크기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 어디서 신호가 나타날지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지구의 내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지구내부 들여다 볼래도 4㎞깊이 이상 탐사 불가



지각과 맨틀, 핵으로 이루어진 지구 내부에 대한 탐사는 극히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현재로선 지진파를 이용하는 것 외에 다른 탐사방법이 없다. 이 방법은 땅에 구멍을 뚫고 작게는 금속 추를, 크게는 폭약을 터뜨려 이 진동이 전달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질자원연구원 지질기반연구부 이병주 박사는 “지표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6,400㎞에 달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4㎞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면서 “그 이상 들어가면 온도가 너무 높아 어떤 물질이라도 녹아 내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반도 아래가 어떤 형태의 지각으로 이뤄졌는지조차 아직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며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유전자 수가 극히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유전자는 선충 수준 만물의 영장 노릇 어떻게



인간의 유전자 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약 2만5,000개에 불과하다. 생명공학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적어도 10만개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던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는 풀 종류인 아기장대나 C. 엘리건스라는 선충과 비슷한 수준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이처럼 적은 수의 유전자를 갖고 어떤 생물체에도 뒤지지 않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힘쓰고 있다.

▦물리학의 ‘대통일 이론’은 성립할 수 있을까

표준모형 중력배제 약점 대체이론 구축 산넘어 산



쿼크나 렙톤 등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표준모형’이라는 이론으로 정리돼 있다. 표준모형이라는 명칭을 얻기까지 이 이론과 관련한 수많은 실험이 진행됐다. 이 모형은 거의 모든 검증 과정을 놀랄만한 정확도로 통과했다. 그러나 표준모형은 중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 구축이 논의되는 중이다.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박재현 교수는 “우주의 생성과 자연 현상을 설명할 새 모델을 만드는데 가장 큰 장애는 그 이론이 맞는지 실험을 통해 증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면서 “표준모형을 대체할 대통일 이론 등이 대두되고 있지만, 양성자 붕괴 현상을 규명하기 어렵다는 점 등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고 설명했다.

▦지구 밖에 생명체가 존재할까

외계생명체 있을까 과학적 증명은 全無



미확인 비행물체(UFO)를 관측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외계 생명체 존재 여부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화성에 한 때 미생물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고는 하나 바로 지금 지구 밖에 살아있는 ‘그 무엇’이 있는지는 풀지 못한 숙제다.

지구 밖 고등생물의 존재를 탐사하는 계획은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라고 불린다. 1960년 미국 코넬대 프랭크
드레이크가 외계 문명이 보내는 전파신호를 잡기 위해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미국국립전파천문대의 전파좆彭堧?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92년 10월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까지 나서 SETI 사업을 추진했지만, 아직까지 ‘외계인의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나머지 난제 20가지는

▦인간 의식의 실체는 무엇일까

▦타고난 유전자는 개인의 건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늘어날 수 있을까

▦동물의 겨울잠은 어떤 요소에 의해 조절될까

▦인간의 피부세포는 어떻게 신경세포로 분화할까

▦단 하나의 체세포가 거대한 식물로 자라는 원리는 무엇일까

▦지구의 생명체는 언제, 어디서 등장했을까

▦종의 다양성을 결정하는 변수는 무엇일까

▦어떤 유전적 변화가 우리를 ‘인간’이라는 특이한 종으로 만들었을까

▦우리의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저장될까

▦동물의 집단 행동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수많은 생물학적 정보를 통해 인간은 자연계의 통합된 모형을 도출할 수 있을까

▦정보처리 속도의 한계는 어디일까

▦원자 및 분자의 화학적 결합은 어느 선까지 가능할까

▦면역 반응을 선택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까

▦양자의 예측 불가능성 아래 심오한 원칙이 숨어있지 않을까

▦효과적인 HIV 백신을 만들 수 있을까

온실효과가 극대화한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는 무엇일까

▦식량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맬더스의 인구법칙’은 계속 틀린 이론으로 남아 있을까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2005년 7월 3일 일요일

미국의 이중성

자기들이 다른 나라에 진출할 때는 모든 것을 인수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더니 자신들의 기업을 외국인이 인수할 때는 국가안전이니 뭐니 하며 방어벽을 치고 있다. 선진국들이 대개 이런 이중적인 플레이를 통해 후진국 이익을 엄청 먹어대고 자신들의 것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다 지키려 한다... 그런 기사가 하나 있어 퍼왔다...
 
중국의  미국 기업 인수 시도에 미국의 조야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일본기업이 미국 자산을 싹쓸이했을 때, 미국에서는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 현상이 나타났었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중국 정부의 의도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또 경제안보 관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레노보가 IBM을 인수할 당시에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첨단기술이 중국으로 들어가 미사일 기술로 전용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었다. 이같은 우려로 레노보가 IBM을 인수하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이번에 CNOOC가 유노칼 인수를 선언한 것을 계기로 미국 조야가 들끓고 있다. 유노칼 입찰에 중국 업체가 참여하는 문제는 미국의 에너지 안보와 직결돼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신용평가사들까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미국 하원 자원위원회 의장인 캘리포니아 출신 리차드 폼보 공화당 의원은 "CNOOC의 유노칼 인수는 미국 경제와 국가안보에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CNOOC가 자유 시장 경제 원칙에 기반해 인수제안을 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 정부가 안보상 이해관계를 갖고 끼어 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앞서 폼보 위원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대통령의 권한을 발동, CNOOC의 유노칼 인수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 푸어스(S&P)는 CNOOC가 우노칼을 인수할 경우 재정적인 문제에 부닥칠 것이라며 신용등급 강등을 경고했다. 무디스는 현재 `A2`로 부여해 놓은 CNOOC를 등급하향 검토대상으로 지정했으며, `BBB+`로 분류해 놓은 S&P도 CNOOC를 `감시대상'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월가의 투자은행들도 나서고 있다. 메릴린치는 CNOOC에 대한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조정했다. 도이치뱅크도 "우노칼을 인수할 경우 CNOOC의 부채비율은 280%로 치솟을 것"이라며 투자등급을 하향했다.

미국의 유수 언론들도 미국 경제에 위협이 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월스트리트저널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딜"이라고 비판했다. 포브스도 최근 "중국이 `천연자원`과 `세계적인 브랜드`를 노리고 미국 기업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미국경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뿐 아니라 중국 기업이 미국 기업을 인수한 뒤 대규모 구조조정을 벌여 미국인의 일자리가 적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푸 청위 CNOOC 회장 겸 최고경영자는 이같은 분위기를 감안, 유노칼 인수를 선언하면서 "미국에서 생산된 석유와 가스는 수출하지 않겠으며, 유노칼 전 직원의 고용도 보장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머니투데이 박형기 국제부장 |  06/24
차베스의 경우 외부에서 군수용품을 사들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다른 나라무기를 사면 호환성이 떨어진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동맹국들을 동원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군수시장에서 우위를 벌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 동맹국들의 군수시장을 미국이 장악하여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미국식으로 통합하려는 의도이다. 이는 미국의 방어 메커니즘의 일환이다

2005년 6월 25일 토요일

서울의 미국스파이들

서울의 美·日·中·러 스파이전력 총점검
  • 서울의 미국 탐정회사 핑클톤 비밀사무실
  • 영어강사·러시아 쇼걸로 변신한 미·러 스파이
  • 일본 외신기자는 일본정보당국의 최선봉
  • 여의도와 신촌의 중국식당은 중국정보기관의 안가
  • 신축 정동 러시아대사관은 최첨단 정보기지

    1997년 7월 이전, 홍콩은 세계 최고의 정보 전쟁터였다. 그러나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그 무대가 이제는 대한민국 서울로 옮겨왔다. 서울이 스파이 천국이 된 것은 이들을 꾀는 미끼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은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국가다. 특히 북한은 외국의 스파이를 유인하는 가장 강력한 미끼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미·일·중·러 등 세계 초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맞선 곳이다. 이들이 상대국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스파이를 서울로 파견한다. 3개월 뒤면 서울에서 월드컵이 열린다. 월드컵 기간중 수많은 외국인이 서울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스파이와 테러요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올해 말이면 한국의 차기 정권을 결정짓는 대통령 선거가 진행된다. 이래저래 서울은 스파이 천국이 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서울에서 활동하는 미·일·중·러 초강대국의 스파이 전력을 총점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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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 미국 : 기계정보에 강해

    자유기고가 겸 영어강사로 활동중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제임스 스미스’(가명)의 공식 직함은 외국어학원 영어 강사, 그는 국내 H출판사에서 한국에 관한 책을 출판한 경력도 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한국의 VIP를 인터뷰하거나 고급 영어를 가르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 친구들에게는 “미국에서 사업차 한국에 왔다가 한국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한 여자와 동거하며 그냥 눌러 앉았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렇게 둘러대지만, 그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과거가 있다.

    그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미공군정보부대 장교 출신이다. 그의 비밀직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국의 사립탐정회사 ‘핑클턴(Pinkelton)’요원. 핑클턴은 현재 서울과 평택에 사무실을 두고 주로 미국측 고객의 주문에 따라 한국내 경제 기밀을 넘기고 있다.

    스미스씨가 근무하는 서울 양재역 외교센터 건너편의 비밀 사무실은 간판이 없다. 사무실은 밖에서 들어가는 문은 하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길쭉한 방 세 개로 나뉘어 있다. 이 방은 모두 서로 연결된다. 이 가운데 두 개는 직원 두 명이 하나씩 쓰고, 나머지 하나는 스파이장비를 보관하는 창고다. 창고에는 파라볼라 안테나가 붙어있는 원거리 도청기, 적외선 망원경, 콘크리트벽을 뚫고 내부를 볼 수 있는 자외선 투시경, 소련제 망원경 등 스파이 장비로 가득 차 있다. 스미스씨와 다른 한 명의 핑클턴 직원은 이 사무실을 공개하지 않고, 사람을 만날 때 주로 외부 호텔을 이용한다.

    180cm 키에 금발 백인인 스미스씨는 양복보다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 최대 강점이 여성을 후리는 재주다. 이런 강점을 이용하여 그는 서울의 특급호텔 나이트클럽이나 바, 레스토랑에서 고관대작이나 재벌가의 부인이나 딸, 며느리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맺고 주요 정보를 캐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어강사 스미스씨
    미·일·중·러 가운데 서울에 정보 역량을 가장 많이 투입하고 있는 나라는 단연코 미국이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 때문이다. 북한은 핵과 생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나라다. 또 각종 테러와 위조지폐, 마약 등 국제 범죄와 연결된 전력을 갖고 있다. 게다가 한국에는 미 지상군이 주둔하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한국내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단위는 대사관의 공식조직과 ORS(Office of Regional Study:지역조사과), FBIS(해외방송청취반), DIA(미국방정보본부), 501정보부대, OSI (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미공군방첩수사대) 등이다.

    이중 핵심은 ORS다. 이곳은‘CIA 한국지부’로 인원만 수십명에 이른다. ORS와 FBIS는 세종로 미대사관 내에 설치돼 있고, DIA, 501정보부대, OSI는 모두 서울 용산 미8군 영내에 있는 군사정보기관이다. 501정보부대는 주로 특수장비를 동원하여 국내의 주요 통신을 감청한다.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측 정보 활동의 기지는 용산 미8군기지다. 우선 각 정보단위의 회합 장소. 용산의 미8군기지 10번 게이트로 들어가서 왼쪽편으로 꺾으면 드래곤힐호텔이 나온다. 호텔 뒤에는 하텔하우스라는 장성전용 레스토랑이 있다. 아늑한 이 레스토랑의 별채에서는 매주 금요일, 남북한의 최고기밀이 오가는 비밀회의가 열린다. 바로 이곳이 서울에 파견된 미국의 여러 정보조직이 한주일 동안 수집한 정보를 공유하고 분석하는 자리다. 이 연석회의를 통해 미국 정보요원들은 두 가지 보고서를 만든다. 한 가지는 미국만 보는 대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캐나다대사관, 영국대사관, 호주대사관과 돌려서 보는 대외용이다.

    이 드래곤힐호텔 옆에는 군청색의 큰 파라볼라 안테나가 걸려 있다. 이 안테나 밑에는 지하벙커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북한군의 교신내용을 감청해서 녹음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한다. 이 벙커에서는 평상시에는 북한 교신 내용을 감청하지만, 한국의 통신을 감청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미국대사관 공식조직뿐이고 미국의 여러 정보조직들은 대부분 막후에서 움직인다. 그 가운데 정치과가 가장 민감한 현안을 다루는데, 현재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정치참사관 밑에 1등서기관 세명이 ▲북한·군사문제 ▲북한·정치문제 ▲한반도 외교·통일문제로 업무를 나누어 맡고 있다. 이 1등서기관 세 명 밑에 각각의 스태프들이 있다. 정치과는 보안 때문에 한국인 직원은 여직원 두 명만 쓰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화이트 요원(공개 정보원)과 블랙 요원(비공개 정보원)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협조자를 운영하며 인간정보(Humau Intelligence:HUMINT)를 획득하고 있다. 지난 1월 말부터 주한미국대사관은 부시 미국대통령 방한 준비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여러가지 업무가 많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한 한국민들의 여론이었다. 이는 기계정보로도 잡아내지 못한다. 미국대사관이 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한국사회의 여론주도층을 접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론주도층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계층은 대학교수 집단이다. 이들을 대사관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해서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다.

    미국정부가 운영하는 정보조직과의 연관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미국인의 정보 수집에는 사설 탐정회사 같은 민간라인도 동원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외국어학원의 영어강사를 동원한 저인망식 여론 수렴과 정보 수집이 한 예이다.

    미국의 정보조직이 정보를 캐기 위해 기를 쓰고 있지만, 한국인이 갖다 바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VIP들이 미군 정보부대의 거점인 용산 미8군 기지 안으로 들어와서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용산의 미군부대에 차량을 타고 입장하기 위해서는 ‘데칼(Decal)’이라는 미군부대 차량출입증이 있어야 한다.

    이 차량출입증이 발행된 차량의 주인은 대부분 한국 관계나 재계의 고위 간부들이다. 이들은 중요한 인사를 만날 때, 미군부대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종종 미8군 영내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이때 이들이 이용하는 레스토랑이 미8군 영내 골프 윈도(Golf Window) 옆에 있는 ‘촘스키 레스토랑’이다. 이 레스토랑을 자주 이용하는 한 정보 관계자는 “이 레스토랑에는 가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가들이 식사를 하러 온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공무원들에게 뇌물 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또 한미연합사나 국방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공군본부의 고급 장교들도 이곳에 출입한다. 여기서 또 고급 군사정보가 오간다. 중요한 것은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모두 미군에 협조하는 정보 끄나풀이라는 사실이다. 이 레스토랑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전부 미군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미국 정보력의 강점은 영상정보·신호정보·측정정보를 총괄한 기계정보다. 미국은 첩보위성과 전세계적인 도감청시스템 에쉴론(echelon)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사항들은 다 잡아내고 있다.

    한반도에서 이를 총괄하는 곳이 바로 경기도 오산의 ‘미 제7공군’ 기지에 있는 복합정보정찰지상센터다. 이곳은 오산 공군기지와 평택시에 있는 험프레이기지를 연결하며 전시 지휘·통제를 담당하는 종합센터다.

    오산 복합정보정찰지상센터는 비밀정보를 수집하고 한미 연합군 사령부가 중대한 지휘와 통제 지시를 내릴 때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곳은 남북한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밤이건 낮이건, 궂은 날이건 갠 날이건 24시간 한반도를 감시한다. 한반도 상공에 떠 있는 U-2R 정찰기도 수집한 정보를 이 센터에 보낸다. 말하자면 한반도 전역이 오산 기지의 수집 권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센터에서 걸러지는 정보는 한반도 주둔 미공군과 한국 공군, 미 태평양함대가 공유한다.
    신동아 2002년 3월호

    미국이 빈국에게 돈을 빌려주는 진짜 이유

    미국이 빈국에게 돈을 빌려주는 진짜 이유

    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지음 / 김현정 옮김 / 황금가지 펴냄 / 1만5천원


    가난을 벗어나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 뭘 좀 해보려고 해도 밑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럴 때 누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서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돈이 어떤 돈이냐는 거다. 그 돈을 왜 빌려주겠다고 나서냐는 거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렇게 빌린 돈으로 공장도 짓고 도로도 깔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음모가 숨어 있다. 컨설팅회사 메인에서 수석 경제분석가로 일했던 존 퍼킨스가 그 음모를 폭로한다. 퍼킨스는 가난한 나라들이 돈을 빌려 쓸 수 있도록 이 나라의 경제 전망을 뻥튀기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돈이 들어가면 그 돈은 고스란히 미국 기업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빚은 갚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나고 이 나라는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에 전기를 들여놓는 공사를 하려고 한다. 퍼킨스의 회사는 이 나라의 예상 경제성장률과 전력 수요량을 계산하고 이를 근거로 미국은 이 나라에 돈을 빌려준다. 돈을 빌려줬기 때문에 발전소나 전력설비를 짓는 일은 모두 미국 기업들의 몫으로 떨어진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전기를 얻은 대신 빚을 떠안게 됐고 미국 기업들은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빚을 갚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빚을 못 갚게 만드는 게 관건이다. 빚을 못 갚게 되면 그만큼 미국 의존도가 높아진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돈이 없어? 그럼 일단 석유를 캐고 그걸 우리나라에 팔아봐. 기술이 안 돼? 그럼 우리가 해줄 테니까 돈만 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군대 대신 기업이 나서는 현대판 제국주의
    에콰도르에서는 100달러어치 원유를 캐면 75달러를 미국의 석유회사가 가져간다. 그리고 나머지 25달러 가운데 15달러 이상이 빚을 갚는 데 들어간다. 정작 이 나라 경제에 들어가는 돈은 10달러 미만에 그친다. 엄청나게 많은 석유를 캐내지만 빚은 갈수록 늘어나고 빈부 격차도 더 커진다. 에콰도르의 석유로 미국이 이익을 챙긴다는 이야기다. 놀랍지 않은가.
    과거와 비교하면 세계는 언뜻 더 평화로운 것처럼 보인다. 무턱대고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군대가 했던 일을 이제 기업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기업정치(corporatocracy)다. 기업은 미국을 업고 가난한 나라들을 마음껏 약탈한다. 그게 미국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미국이 얼마든지 달러를 새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찍어내서 주면 된다. 다른 나라 같으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겠지만 미국은 다르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미국에 수출하는 나라들은 그만큼 부담이 늘어난다. 우리나라는 그래서 미국 국채를 사들여 환율을 억지로 끌어올린다. 미국의 빚을 우리가 떠안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그렇게 만든 돈으로 다른 나라를 약탈한다. 이를테면 빌려줄 때는 돈을 새로 찍어내서 빌려주고 그 돈은 고스란히 미국 기업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빚은 빚으로 남고 그 빚은 결국 그 나라의 석유를 비롯해 천연자원과 값싼 인건비를 팔아 받아낸다. 이게 현대판 제국주의의 작동원리다. 미국의 실체는 곧 기업이다. 이들의 돈을 빌린 나라는 결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부패한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약탈하기가 더 쉽다. 돈을 왕창 끌어다 뿌리면 언뜻 발전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갚을 걱정은 나중에 하더라도 당장은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만큼 국민들 지지도 얻을 수 있다. 그는 나라의 미래를 저당잡히고 부와 권력을 얻는다. 그런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겠지만 그 나라에 미치는 미국의 힘은 갈수록 커진다.
    부패하지 않거나 미국에 저항하는 정부는 골칫덩어리다. 그런 나라들에는 ‘자칼’이 들어간다. 미국 석유회사들을 내쫓겠다고 공언했던 에콰도르의 대통령 하이메 롤도스는 헬리콥터 폭발사고로 숨졌다.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미국에서 되찾아왔던 파나마의 대통령 오마르 토리호스 역시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퍼킨스는 이들의 죽음에 미국 중앙정보국이 개입돼 있다고 주장한다.
    ‘자칼’마저도 실패하면 그때는 군대가 들어간다. 미국은 결국 1989년 파나마 침공을 감행한다. 사망자수는 미국 통계에 따르면 600명, 인권단체 통계에 따르면 5천명에 이른다. 마누엘 노리에가 대통령은 미국으로 끌려와 4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미국은 말 잘 듣는 꼭두각시 대통령을 앉혀놓고 파나마 운하를 지배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길을 걸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넘쳐나는 돈으로 산업화를 계획했고 그 사업을 모두 미국 기업에게 맡겼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많이 팔면 팔수록 미국도 함께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라크는 달랐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 정부와 거래하기를 거부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버려두기에 이라크의 석유는 너무 엄청난 규모다. 미국은 9·11 테러를 전쟁의 구실로 삼았지만 정작 오사마 빈라덴을 배후 지원한 사우디아라비아나 그가 숨어 는 아프가니스탄은 내버려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재선사업이라는 구실로 기업들의 약탈이 시작됐다. 세계 최대 규모라는 이라크의 석유는 그렇게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퍼킨스는 이라크 다음의 희생양이 베네수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산유국이다. 미국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이 나라에 엄청난 빚을 떠안기고 약탈을 시작했다. 말 안 듣는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반정부 시위를 배후 지원하거나 군대를 매수해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라크처럼 자칫 전쟁으로 치닫을 위험도 얼마든지 있다.
    신자유주의가 남긴 상흔, 한국도 후유증
    9·11 테러 때는 3천명이 죽었지만 세계적으로 날마다 2만4천명이 굶어서 죽는다. 가난은 더욱 확산된다. 30년 전에는 굶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굶는다. 퍼킨스는 그들의 죽음에 미국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딸과 그 딸의 아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금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한 미래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가 모두 갚았다. 그러나 그 빚을 갚는 동안 우리 경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신자유주의와 금융 세계화 구조를 받아들였다. 기업은 돈을 벌지만 일자리는 줄어들고 개인은 가난해지고 빈부 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부는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걸 성장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유는 결국 기업의 자유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시장의 새로운 질서라고 착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의 식민 지배 음모가 숨어 다. 더 늦기 전에 그 음모를 꿰뚫어 봐야 한다. 미국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을 버리고 이제 미국 이후의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2005년의 세계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정환/ 월간 <말> 기자 top@leegeonghwan.com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2005년 6월 4일 토요일

    [펌] 네오콘의 음모

    ‘북폭설’은 네오콘의 음모
       
    ⓒGAMMA미국이 괌에 있는 앤더슨 기지(위)에서 B52로 북한을 공격하리라는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없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한반도 위기설에 대해 이 분야 전문가들이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미국이 섣불리 북한 공격에 나서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우선 북한이 가지고 있는 핵 미사일 능력이 그 한 이유다.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그 즉시 북한도 주한 미군기지와 주일 미군기지, 그리고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것이다.문제는 그 수준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미국이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영변 핵시설 등을 벙커버스터로 공격한다고 할 때 그 가공할 핵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가 바로 두 번째 문제다.영국의 핵전문가 존 라지 박사는 핵탄두 하나만으로도 사망자가 43만명, 미국 국립조사위원회(NRC)의 한 보고서는 100만명 이상으로 보기도 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미국 강경파는 중국과 러시아에 바람의 방향이 동남풍일 때를 택할 테니 양해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남한이나 일본 쪽으로 바람이 불 때 공격하겠다는 뜻인데, 그들의 정신 상태를 감정해 보아야 할 것 같다.한국이나 일본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얘기다.

     

    이라크의 늪에 빠져 북한과 전쟁 불가능

     

    북폭설에 불을 지핀 지난 5월6일자 미국 NBC 방송 내용은 이 밖에도 군사학의 ABC를 무시한 매우 유치한 시나리오를 담고 있기도 하다.미국 국방부가 지난해 9월 이후 괌의 앤더슨 기지에 B52 폭격기 6대와 F15 전투기를 배치하는 등 대북 선제공격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는 것이 당시 보도의 골자다.

    NBC도 지적했듯이 북한의 지하 핵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합동정밀직격폭탄(JDAM) 100여발을 탑재한 B52가 괌에서 한반도까지 날아오려면 5시간이 소요된다.거리가 약 3천km이므로 F15E로 날아와도 최소 2시간 이상 3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최소 2시간에서 5시간까지 평양을 향해 이들 비행기가 날아오고 있는 동안 북한은 놀고만 있겠느냐는 것이다.‘핵 선제 공격 능력은 미국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평소의 주장을 무시할 일만은 아니다.북한은 비행기가 아니라 미사일로 공격할 테니 시간도 많이 안 걸린다.

    “미국이 최소한 일본 본토나 오산·군산 기지에 핵 폭격기를 배치했다면 모를까 괌은 아니다”라는 것이 군사전문가의 지적이다.아무리 양보해도 주력군이 모두 중동의 늪에 빠져 있는 지금 북한과 무모한 전쟁을 벌인다고 상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선제 공격 자체보다는 누가 왜 이런 얘기를 유포하는가에 오히려 주목해야 할 상황이다.최근 미국 내 한반도 위기설의 진원지는 체니를 수장으로 하고 있는 네오콘과 국방성이다.

    이들이 지난해부터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온 일이 바로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미·일 동맹 강화, 그리고 최근 들어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지난해 이후 이들이 국제 사회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이같은 목표를 한꺼번에 추진해오는 과정에서 북핵 문제만큼 유용한 명분은 없었다.

    따라서 북핵 위기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 군부가 안보 위기를 계속 느끼도록 압박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김정일 위원장이 쉽게 핵 포기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2월10일 북한 외무성의 핵보유 선언이나 3월31일 군축회담 주장 등 북한측의 경직된 자세의 배경에는 바로 이들의 움직임이 작용해온 것이다.

    결국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보고만 핵을 포기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국 네오콘에 대해서도 국제 사회가 감시하고 압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펌] 중국의 아시아 패권주의 실현단계로 ‘성큼’

    중국의 아시아 패권주의 실현단계로 ‘성큼’

     

     

    “미국은 못 믿어도 중국은 믿는다” … 미국·EU 제치고 역내 최대 무역국으로 부상

     

    아시아 패권국을 꿈꾸는 중국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있다. 파키스탄에는 중국 상품들이 넘쳐나고 현지 언론들은 중국을 무기수입 및 기술이전뿐 아니라 경제교류 부문에서도 믿을 수 있는 나라라고 극찬하고 있다. 파키스탄을 영향권 안에 두고자 하는 중국의 ‘야심’이 실현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파키스탄 일간 더 뉴스는 “최근 중국의 JF17 전투기 파키스탄 수송 일정 발표는 파키스탄과 중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보여 준다”면서 “전투기에서부터 군함까지 파키스탄 정부는 중국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무기 공급국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중국-파키스탄의 유대관계는 미국이 수년간 부과해오다 9·11 테러 직후 해제한 경제제재 기간 동안 더 강화됐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난 3월 15년간 부과해온 파키스탄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를 해제하면서 향후 5년간 최소 15억 달러의 무기를 공급을 약속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인들은 미국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 사이 경험으로 보건데 미국은 언제나 말을 바꿀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구소련과의 전쟁 당시 파키스탄은 미국을 지지했다. 그러나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물러나자 미국은 파키스탄에 F16전투기의 공급을 중단했다. 이로 인한 무기수급 공백은 중국으로부터 무기수입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파키스탄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뼈에 사무친 듯하다. 중국과 파키스탄간 JF-17 제트기 공동 생산 프로젝트는 3개월 전 미국이 파키스탄에 15년간 부과해온 무기금수를 해제하고 F-16 제트기를 판매한 직후에 나온 것이다.

    중국과의 무기거래가 가져올 수 있는 기술이전의 이점도 무기생산 자립을 원하는 파키스탄의 욕구에 부합한다.

    파키스탄은 내년 JF-17 ‘천둥’ 제트기 4대를 시범 운항할 예정이며 2007년부터 총 150대를 제공 받는다. 중국 파키스탄 양국은 JF-17 제트기 400대를 공동 생산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 중 250대는 중국 공군이 사용하게 된다. 파키스탄 공군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타국으로의 수출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무기거래 및 협력 강화는 중국의 군사력확대와 패권을 경계하는 미국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다.

    중국의 ‘아시아 경제 주도국의 꿈’도 현실화 되고 있다.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아시아 최대 교역국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2002년 중·일·한 자유무역의 구상을 내놓은 뒤로 꾸준히 ‘아시아경제협력 일체화’의 이름으로 그 실현을 촉진하고 있는 중국은 지난해 10월 아세안과 상품분야 FTA협상을 타결했다. 그 결과 2010년까지 중국과 아세안 회원국가간 모든 공산품은 무관세로 거래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2003년부터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으며 일본과는 2004년 교역액 22조7000억엔을 기록, 미국을 제치고 일본 최대교역국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은 또 아세안에 이어 인구 8억 인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중국은 이미 인도와 FTA 논의를 시작했다. 지난해 중국-인도 거래액은 64억달러를 기록하면서 중국은 일본을 누르고 인도의 역내 최대교역국으로 부상했다. 경제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국, EU를 누르고 3년 내 인도 최대 교역국의 지위에 오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카슈미르 분쟁으로 인도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파키스탄과도 무기판매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로서 경제적 협력 및 진출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완공된 파키스탄 남부 그와다르(Gwadar)의 항구물류단지 건설을 지원했다.

    [펌] 북핵문제 본질은 북 중 갈등

    북핵문제 본질은 '북·중 갈등'

    핵실험 강행땐 무력충돌 가능성 높다

    중국 "대만 복속 프로그램에 걸림돌" 인식

    북핵제거 초강수에 북한 반발…"최종 해법 중국에 달려" 시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지난 2월 10일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한 이후 현재까지 그 파장이 그치지 않고 있다. 북핵 문제는 지금까지 주로 북한과 미국간의 치열한 줄다리기로 비쳐져 왔다. 그러나 북핵 문제의 본질은 북한과 중국의 불협화음에 있다는 분석이 최근 부각돼 관심을 끌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복속시키려는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사전에 걸림돌이 되는 북한 핵을 제거하기 위해 초강수를 두었다가 역풍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이 순차적으로 강경 액션을 취한데 대해 북핵의 실질적 이해 당사국인 중국과 미국이 각기 다른 해법을 제시하면서 현재까지 ‘긴장’의 파고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의 얘기다.

    이에 따라 북핵 딜레마의 해법은 궁극적으로 중국에 달려있다는 것이 이 소식통의 판단이다. 미국은 북핵에 반대하면서도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를 저울질하며 한 발짝 물러나 있고, 6자 회담의 아웃사이더격인 한국과 일본, 러시아는 3각(북한-중국-미국) 게임을 예의주시하며 적절한 보폭을 취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의 방북이 재추진되고 북한의 6자 회담 복귀 시나리오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지만 북한은 아직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중국의 원유 공급중단에 4월 춘궁기(春窮期)를 거치면서 응어리진 분이 풀리지 않은데다 일단 빼어든 칼(핵 보유 선언)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북한과 중국간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대만 정책으로부터 비롯됐다.

    중국은 올 초 확고한 후진타오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따라 대만을 복속시키려는 계획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대만이 2기 천수이벤(陳水扁) 체제 출범 이후 독립을 노골화하자 3월 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서 대만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반국가분열법안을 압도적인 지지로 표결 통과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북한 "해볼테면 해보라" 강경 입장
    그러나 북한 핵이 문제였다. 북핵은 대만이 핵을 보유할 수 있는 가장 큰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고 만일 대만이 핵을 보유하게 되면 핵을 둘러싼 중국-대만 문제에 UN이 개입하게 된다. 그럴 경우 중국의 대만 복속은 물건너가는 것이 되고 나아가 중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

    중국은 이런 우려에서 대만 복속에 장애가 되는 뇌관(북핵)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북한의 ‘생명줄’이기도 한 에너지와 식량 지원 중지 카드를 빼들었다. 중국은 이를 결행하기에 앞서 작년 중순부터 일부씩만 보내주며 그해 9월 리장춘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평양에 보내 중국의 뜻을 확실히 전달했다. 그러나 북한은 10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해볼테면 해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11월, 중국은 단둥(丹東)에서 서평양으로 연결된 송유관을 통한 기름 공급을 중단했다. 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파종을 위한 기름이 절실한데도 중국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은 중국과 대만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정면승부를 띄었다.

    2월 10일 ‘6자회담 무기한 불참과 핵무기 보유 선언’이라는 초강수를 던진 것. 북한이 강수를 둔 이면에는 러시아의 기름 지원도 한 몫 했다. 2000년 7월 김정일-푸틴간의 북ㆍ러 정상회담에서 마련한 초안을 바탕으로 2003년 극동 러시아를 중심으로 경제 교류와 에너지 산업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출범한 ‘라손’이라는 조직이 올 2월부터 북한에 기름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북한의 폭탄선언에 다급해진 쪽은 중국이었다. 왕자루이(王家瑞) 대외 연락 부장을 대표로 한 중국공愿?대표단이 2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데 이어 3월 23일엔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이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을 갖고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나섰다.

    그러나 북한은 박봉주 내각 총리가 3월 말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 ‘북핵은 국가 자위에 관한 문제이니 관여하지 말라’는 내용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전달, 종래 입장을 확고히 했다.

    북한은 나아가 4월 18일 영변 5MW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실력 행사에 나섰고 5월 7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핵무기 보유국의 지위에 걸맞은 조선의 행동계획은 이미 책정돼 있다”며 은근히 핵실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리고 나흘 뒤인 5월 11일 “8,000개의 ‘사용후 핵연료봉’ 인출을 끝냈다”고 발표, 핵실험 강행 의지를 보였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북한은 1998년 파키스탄에서 핵실험을 한 적이 있고 미국 위성 감시망에 의도적으로 드러낸 함경북도 길주의 지하 동굴과 같은 곳이 여러 군데 있다”며 “중국의 태도 변화와 미국을 겨냥해 지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북·중 국경지대 긴장고조 분위기
    중국은 북한의 움직임에 긴장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의 한 고위관리는 최근 “북한이 만약 핵실험을 할 경우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라면서 “중국은 그런 행동에 반대하며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도 5월 23일 중국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북한의 핵실험 여부는 중국도 결정할 수 있다”면서 북한의 핵실험 준비가 구체화될 경우 중국이 직접 대북 영향력 행사를 통해 중단시킬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핵실험을 강행하려는 북한과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것을 막겠다는 중국이 충돌하면서 실제 핵실험이 현실화될 경우 북한과 중국 간에 무력 충돌도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 최고위층과 선이 닿아 있는 중국 동포 K씨는 “지난해 말 중국이 기름 공급을 중단하면서 북ㆍ중 간에 긴장이 고조돼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녕성(遼寧省) 인민해방군 14만명이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ㆍ한국의 구정에 해당하는 명절)에 휴가를 못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면서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 되면 중국이 무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K씨는 “중국은 북한내 임가공, 광업, 수산업 등 전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한 상황이고 중국인들도 상당수 들어가 있어 북ㆍ중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중국은 자국 재산과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국경을 넘어갈 것이 확실시된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초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것이나 후진타오 주석의 평양 방문이 재추진되고 있는 것은 ‘충돌’ 분위기를 완화시키려는 신경전의 성격이 짙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후 주석의 방북 전제 조건으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약속 받으려 하고 미국에 협조를 요청한 반면, 북한은 중국에 침묵한 채 미국에게 체제 보장과 경제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3각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핵 포기를 강요하는 미ㆍ중과 “핵은 자위 수단”이라는 북한의 이해가 충돌하면서 북핵 딜레마는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K씨는 “북한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질수록 핵실험 강행과 중국과의 충돌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이 북핵 문제는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맡기고 경협을 통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과연 남ㆍ북한이 어떠한 선택을 할 지 기로에 서있는 상황이다.


    2005년 5월 17일 화요일

    [펌] [세계의 갈등 지도 (10)|중국 vs 티베트]

    [세계의 갈등 지도 (10)|중국 vs 티베트]

    ‘중화민족론’ 거부한 政敎合一정권의 1000년 투쟁
    중국과 티베트의 해묵은 갈등은 티베트를 중국의 한 지방으로 보는 중국과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티베트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한다. 현재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한 상태. 티베트 망명정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독립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티베트 독립문제엔 중국, 인도, 미국, 영국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1.티베트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 앞 광장에서 펄럭이는 중국 국기.
    2.조지 부시 미대통령을 만나 합장하고 있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3.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

    중국 난징에서 발행되는 신문 ‘양쯔완바오’ 7월20일자에 ‘통역은 원래 함정이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마안산과 난징의 위화타이 지역을 오가는 장거리 버스에서 2명의 사기꾼이 가짜 달러와 인민폐를 환전한 사기 사건에 관한 기사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버스에 탄 한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통역을 자청한 한 중년남자가 “이 남자는 티베트인인데 난징에 오면서 인민폐를 가져오지 않아 달러와 환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몇몇 승객들이 환전을 해줬고 버스가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두 남자는 사라졌다.

    사기사건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이 사건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선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원이지만 그 언어가 확연히 달라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민폐다. 그 사기꾼이 사용한 10위안(元) 짜리 인민폐는 앞뒤에 한족(漢族), 몽골족(蒙古族)의 인물 두상과 조모랑마봉(히말라야산)이 찍힌 구권(1988년 발행)이거나 아니면 앞뒤에 마오쩌둥 두상과 장강삼협이 찍힌 신권(1999년 발행)이었을 것이다. 신권 50위안 짜리 후면에 티베트 포탈라궁이 등장하는데, 인민폐에 티베트 관련 도안이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화폐 도안은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치상황까지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이 경우 인민폐에 티베트궁이 도안된 것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는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

    티베트는 중국 서부의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보통 티베트인들은 티베트를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 3대 지역은 티베트의 중심지인 위(중앙 티베트) 지역과 남부의 짱 지역(통칭하여 위짱 지역), 현재 중국 쓰촨성 서부 지역과 창두(昌都) 지구를 포함하는 캄(동부 티베트), 그리고 칭하이(靑海)성과 깐쑤(甘肅)성 남부를 포함하는 암도(동북부 티베트)다.

    중국은 1951년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접수하고 티베트의 국가적 존재를 부정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가 13세기 부터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만약 티베트인들이 중국 정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던 이른바 ‘티베트 사변’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티베트 분쟁의 중심에 있던 샤거파를 비롯한 망명 티베트인들은 중국과 매우 상이한 주장을 펴고 있다. 즉 1951년 5월23일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17개조 협의’가 체결되기 전까지 티베트는 독립된 국가였다는 것이다.

    티베트를 둘러싼 국제적인 ‘논쟁’은 치열하지만, 실제 티베트에서의 ‘분쟁’은 얌전한 편이다. 다른 분쟁 지역처럼 전투나 폭탄테러가 빈발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 티베트에는 고강도 논쟁과 저강도 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청대의 티베트 정복, 국민당 시대의 세 차례 전쟁, 1950년 무렵 공산정부와의 전쟁, 1959년의 독립운동 등을 거쳐서 나타난 국면이다.

    고강도 논쟁과 저강도 분쟁

    과거 티베트인들은 ‘티베트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7세기 초반에서 9세기 중엽까지 중국 한족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티베트 지역의 토번(吐蕃)제국에서 연유한다.

    토번왕조 전에도 중국과 티베트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가간 접촉은 7세기초 토번 왕조의 쏭쳰감포(569∼650)가 티베트 고원을 통일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전쟁과 화친을 반복한 토번과 당(唐)나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현안은 영토 분쟁이었다. 634년 시작된 토번과 당의 외교관계는 846년 토번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토번왕조 때 티베트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런 경험은 티베트인들이 중국과 티베트를 대등한 위치에 놓게 한 역사적 배경이 됐다.

       

    토번제국의 붕괴 후 티베트는 400여 년간 분열되었다. 그러는 동안 티베트에는 불교가 가장 중요한 사회구성원리로 자리잡았다. 송(宋)대에 이르러 티베트의 일부 세력은 송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 불교와 중국 왕조에의 책봉조공 관계는 이후 티베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중국 정부는 ‘원(元)대 이래로 티베트는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원대에 중국과 티베트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티베트에는 몽골 세력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불교의 유력한 종파인 싸카파 종파에 의한 정교합일 정권이 형성됐고 몽골족은 중원을 통일해 원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원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기존의 책봉조공 관계 외에 ‘최왼’ 관계가 나타난다.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정신적·종교적 지지와 세속적·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법주-시주, 즉 종교적 지도자-세속적 군주)’ 관계가 맺어진 것. 최왼 관계는 당시 싸카파 종파의 고위 승려인 싸카파디따(薩迦班智達)와 칭기즈 칸의 손자인 고댄 사이에 처음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전쟁 없이 티베트를 몽골 제국에 편입시키고 싸카파 종파는 티베트에서 정교합일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싸꺄빤디따를 이어 싸카파 종파를 관장하던 팍빠(八思巴)와 몽골의 쿠빌라이 칸 사이에도 맺어졌다.

    상부상조 ‘최왼’ 관계

    이러한 최왼 관계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한 것이었다.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고승들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족들이 원나라에 순순히 귀순하도록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했고, 원나라는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정교합일정권을 현실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당시 원나라 경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즉 단순히 원나라의 통치 대상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원나라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원나라 붕괴 후 명(明)나라가 들어섰지만,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은 원나라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명 초기인 1409년 티베트 내부에서 총카파(1357∼1419)가 창립한 겔룩파 종파(黃敎)가 교단의 정화와 계율을 강조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겔룩파 종파는 총카파가 사망한 후 활불전세(活佛轉世)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고승이 사망하면 교단에서 어린 전생자(前生者)를 찾아 계보를 잇는 독특한 승직 계승 방식이다. 이는 후에 달라이 라마 제도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는 3대 달라이 라마 쐬남갸초(1543∼88)에서 시작됐다. 정교일치 사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통치력은 중부 티베트에만 미쳤을 뿐 티베트 전역을 포괄하진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는 티베트를 넘어 몽골과 만주 일원에까지 미쳤다.

    겔룩파 종파는 만주에서 청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도 몽골 세력과 최왼 관계를 맺으면서 몽골 부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교합일정권을 지켜왔다. 명대에 이르러 몽골은 동몽골과 서몽골 연맹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1510년 이후 동몽골 부족들이 부족간 갈등을 겪으면서 칭하이(靑海) 쪽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인과 티베트인의 접촉 과정은 몽골군의 일방적인 티베트 점령이 아니라 원대 이래의 최왼 관계를 회복하는 형식을 취했다. 동몽골의 지도자 알탄 칸(1543∼82)은 1578년 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 최왼 관계를 맺었다. 이 만남은 몽골인들 사이에 티베트 불교 신앙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1637년 서몽골 준가르 부족의 일원인 구시칸(?~1656)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에 들어와 5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6년 후 구시칸은 티베트의 내분을 틈타 티베트 전역을 통일하고 티베트 통치권을 5대 달라이 라마에게 보시했다. 이렇게 하여 티베트인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5대 달라이 라마 시대가 열렸다.

    1653년 5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해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이 만남은 티베트에게는 최왼 관계의 수립을 의미했으나 청조의 입장은 몽골인에 대한 통제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다.

    청조는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최고위 승려인 달라이 라마를 우대했다. 하지만 점차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전제조건은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1720년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역을 장악했다.

    청대에는 피정복자 위치로 전락

    청조의 티베트 통제는 이전의 왕조들보다 훨씬 강화된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1720년 이후 티베트는 청조에 대해 피정복자의 불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티베트 내 청나라 병력 주둔과 1727년 주장대신(駐藏大臣)의 설치, 1792년 달라이 라마에 대한 금병추첨제도(주장대신이 금병 속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전생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이름과 생년이 쓰여진 상아편을 뽑아 후대 달라이 라마를 결정하는 의식) 도입 등은 티베트의 종속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청조는 18세기 후반 티베트 지역을 포함하는 제국 체제를 완성했다. 18세기 청조의 판도는 현대 중국인의 영토 인식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조는 본부(本部) 18성과 번부(藩部)의 이원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이런 체제 속에서 청조의 변방 민족에 대한 지배는 전례 없이 강한 것이었다. 몽골은 청조의 철저한 ‘분할지배 정책’으로 인해 예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서역도 ‘신장(新疆)’이란 이름으로 청나라에 통합됐다. 또 청조는 동부 티베트인 캄을 쓰촨성 관할 하에 두었고 창두(昌都) 서쪽 땅만 달라이 라마의 관할로 인정했다.

    청조는 ‘은위겸용(恩威兼用)’, 즉 은혜와 위력의 탄력적 활용이라는 일종의 상벌 원리로 제국을 운영했다. 티베트에서도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통제가 이뤄졌다. 그런데 은혜의 개념은 매우 광범위해 주장대신을 파견한 것도 황제의 은혜였고, 책봉행사·조공무역과 같은 불평등한 예속관계도 은혜라고 표현했다. 물론 청조의 병력 배치도 은혜였다. 하지만 청 황제와 달라이 라마가 최왼 관계를 형성했다는 티베트인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티베트인들이 단순히 자신을 청조의 피정복민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인들은 청제국 체제에서도 정신적으로는 자신들을 경영진의 일원으로 인식했다. 청조의 공문서는 황제를 ‘천명 황제’라고 표현했으나, 티베트 공문서는 청조 황제를 ‘문수보살 대황제’라고 인식했다. 즉 청조는 황제가 천명을 받은 최고지도자라고 규정했지만, 티베트인들은 황제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불교적 개념인 ‘문수보살’로 인식했다.

    티베트인의 자부심이 어떻든 18세기 티베트는 자립성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청조 군대가 티베트에 출병하면서 1751년 맺어진 ‘서장선후장정(西藏善後章程) 13조’와 1793년 ‘흠정장내선후 장정(欽定藏內善後章程) 29조’는 티베트에 청조의 권위를 확실하게 심어놓으려는 조치였다. 또 이는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종교적인 것에만 한정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관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 왕인 문수보살 대황제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즉 1720년부터 1840년대 중반까지 티베트는 공식 문서에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내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자율성은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다. 이는 추후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청조에 복속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티베트에는 중앙정부에 해당하는 달라이 라마의 정교일치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청조는 지속적인 이완과 해체의 과정을 겪었다. 특히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변방 민족들의 자립 경향이 거세졌고 이는 제국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청조는 서구 나라들과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지만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변방 민족과는 가능한 한 전통적인 책봉 조공 관계와 지배 종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1880년 이후 청조는 이전의 본부와 번부라는 ‘이원적 행정체계’를 폐기하고 번부에 본부와 동일한 행성을 설치했다. 청말기에 행성이 설치된 지역은 신장, 대만, 그리고 동삼성(東三省)이다.

    본부와 번부의 일원화 정책은 신장에서 먼저 시도됐다. 1864년 회교도 민중의 반란으로 신장 통치가 위협받자, 청조는 양무(洋務) 관료 쭤쫑탕(左宗棠)을 파견해 진압했다. 쭤쫑탕은 청조에 신장에 행성을 설치하자고 건의한다. 이 건의는 1884년 11월17일에 비준을 받는다. 이로써 청조는 행성 설치를 통하여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이완된 제국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다. 청말의 행성 설치는 영국, 러시아 등 유럽 열강과 신흥 열강 일본의 중국 침략이라는 국제적 배경과 변방 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이라는 내부적 배경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유럽 열강 중에서도 티베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영국이었다. 티베트가 영국의 ‘소중한’ 식민지였던 인도와 접해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영국은 두 세기 동안 인도를 통치했다. 영국은 1600년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얻다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을 격파한 뒤 1849년에 이르러 인도 전역을 장악했다. 1830년 이후 영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세력권을 확대하기 위해 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청의 신장에서 부딪혔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는 티베트에서 부딪혔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까지 인도 식민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3개의 완충지대(티베트, 인도양, 아프가니스탄), 2개의 동심원, 1개의 내륙호수(인도양)’라는 전략을 구상했다. 영국인들은 인도양을 ‘브리튼의 호수’로 삼고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는 완충지대, 티베트를 중국의 위협을 흡수하는 완충지대로 설정했다. 또 두 개의 동심원 중에서 안쪽 동심원은 인도 북부 변경의 네팔, 시킴, 부탄과 아삼이었고 바깥쪽 동심원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타이, 티베트였다.

    영국과 두 차례 전쟁 끝에 문호 개방

    제국주의의 폭풍이 몰려오던 19세기말은 티베트에서도 급변의 시기였다. 인도와 네팔 쪽의 국경지대에서는 인도에 대한 직접 통치에 나선 영국이 티베트에 개방과 통상을 요구했다. 티베트가 자신의 세력범위로 생각하고 있던 재중(시킴)과 부탄은 1861년과 1865년에 영국의 세력범위로 편입됐다. 또 네팔은 1860년 영국-네팔 조약을 맺어 친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티베트 당국에 위협을 가했다.

    영국의 위협에 티베트인들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851∼61년에는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승려와 관리들은 종교가 다른 서양인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서약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당시에 청조는 티베트를 개방하라는 영국의 강한 요구와 티베트의 완강한 문호 폐쇄 방침에 직면하고 있었다. 외국인의 티베트 접근이 문제가 된 것은 ‘옌타이 조약’ 체결 이후였다.

    1876년 영국은 청정부와 ‘옌타이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중 영국인이 여권을 갖고 티베트를 거쳐 인도와 중국을 오갈 수 있다고 규정한 조항이 있었다. 티베트인들은 이 조항과 관련해 주장대신이 영국인을 비호할 거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7년 티베트 정부 까샤(티베트에서 내각은 까샤로 불림)는 룽툴라 산의 다지링(大吉嶺)에 감시초소를 설치했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티베트와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작은 분쟁끝에 결국 1888년 제1차 티베트-영국 전쟁으로 비화됐다. 이 전쟁에서 영국은 그레이험 장군이 거느린 2000명의 병력이, 티베트는 정규군 900명에 민병들이 참여했다.

    1888년 3월 영국군은 룽툴라 초소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러자 13대 달라이 라마와 까샤는 1만여 명의 병사와 민병을 전선으로 보냈지만 티베트군은 영국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임 주장대신 성타이(升泰)는 티베트의 항전을 막으려고 했다.

    이 전쟁은 티베트로서는 근대식 화기의 위력을 확인한 값비싼 수업이었지만, 영국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작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티베트 국내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 1890년 청과 영국은 ‘중영회의장인조약(中英會議藏印條約)’ 8조를 체결했다. 여기에는 티베트 문호를 개방한다는 조약이 포함돼 있었으나 티베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상황에서 1895년 8월 13대 달라이 라마는 친정을 시작했는데 영국과의 전쟁, 청조의 신정(新政) 단행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속에 티베트 민의는 독립국 수립으로 모아졌다.

    영국은 티베트가 자유로운 통상을 거부하고 이전의 조약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제2차 티베트-영국 전쟁을 시작했다. 영허즈번드 대령 휘하의 영국군은 1150명의 병사와 1만명의 인부로 구성돼 있었다. 1904년 3월31일 영국군과 티베트군이 추믹 계곡에서 처음 부딪친 이래, 영국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티베트군을 내리 격파했고 그해 8월 수도 라싸에 진입했다. 8월3일 13대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우르가(울란바토르)를 향해 길을 떠났다. 제2차 티베트-영국 전쟁은 1904년 9월7일 영허즈번드와 티베트 대표 사이에 라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됐다. 이 조약의 주내용은 티베트의 조모, 걍쩨, 가톡을 개방하고 영국에 배상금 750만루피를 지불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과의 두 차례 전쟁을 통해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야 한다고 느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이 목적을 위해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한편 라싸조약과 영국의 티베트 독립 시도는 청조에 큰 충격을 줬다. 영국은 청조가 라싸조약을 승인하지 않자, 청조와 협상을 벌여 1906년 4월 ‘중영속정장인조약(中英續訂藏印條約)’ 6조를 체결하며 ‘영국과 중국은 티베트의 정치를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또 영국은 1907년 8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러 협정’을 체결해 티베트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막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티베트에서의 청조의 명목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내정에 대한 간섭은 금지한다고 합의했다.

    티베트 주도권 놓고 중·영 갈등

    청조는 장인탕(張蔭棠)을 파견하여 주장대신 롄위(聯預)와 함께 티베트에 정치개혁을 진행하도록 했다. 청조는 티베트인과 영국의 반대로 티베트에 행성을 설치할 수 없었지만 ‘행성의 도’로 재정비해 군사, 교육 등 광범위한 개혁에 나섰다. 이 개혁의 초점은 달라이 라마를 종교 지도자로만 한정하려는 데 있었다. 이렇게 티베트 중심부에서 개혁이 진행될 때, 동부 티베트에서는 변무대신(川?邊務大臣) 자오얼펑(趙爾豊)의 주도로 ‘개토귀류’ 조치, 즉 토사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현(縣)을 설치하는 작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는 광서제와 서태후의 초대를 받아 1908년 8월3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8월20일 황제와 태후를 만난 자리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는 5대 달라이 라마의 전례에 따라 주장대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상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또 그는 동부 티베트에서 변무대신 자오얼펑이 추진하고 있는 개토귀류 조치와 중부 티베트에서 장인탕이 추진하는 정치개혁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했다.

    1909년 겨울 청조는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완전한 ‘영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쓰촨의 육군 병력을 라싸로 파병했다. 1910년 2월12일 청군은 라싸에 진주했고 그 날 달라이 라마 일행은 라싸를 떠나 10일 후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갔다. 롄위는 청정부에 주청하여 13대 달라이 라마의 명호를 박탈했다. 겔룩빠 종파에서 달라이 라마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짱 지역을 관할하던 9세 판첸 라마를 라싸로 와 머물도록 했다. 판첸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 같은 조치는 달라이 라마의 판첸에 대한 원한과 청조에 대한 이심(離心) 정도를 심하게 했다.

    쓰촨군의 티베트 장악은 티베트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궁극적으로 티베트 내 친영파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쓰촨 군 내부에 보급품이 원활하게 지급되지 않았고 라싸의 쌀값이 두 배로 뛰자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내부 봉기와 티베트군의 반격으로 쓰촨군은 티베트에서 축출됐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에 돌아와 한인(漢人)을 모두 축출하고 주장대신도 추방했다.

    1912년 2월15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선포했다. 그중 3조는 “중화민국 영토는 22행성, 내외몽골, 티베트, 칭하이로 한다”고 규정했다. 4월22일에 위안스카이는 “현재의 오족공화(五族共和)는 몽골, 티베트, 회강 각 지방이 함께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라는 명령을 반포하였다. 1912년 6월22일 중국 국무원 회의에서 티베트에 행성을 설치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 조던은 위안스카이에게 “영국의 입장은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대해 종주권이 있을 뿐 주권은 없다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중국정부가 이에 반발하자 영국은 즉각 티베트 당국이 티베트 독립을 선언하도록 했고 이를 영국이 첫 번째로 승인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티베트 지역에 행성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영국과 티베트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위안스카이 정부는 1912년 7월 몽장사무국(蒙藏事務局)을 설치해 티베트와 몽골 관련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군대의 내분을 이용해 중부 티베트뿐 아니라 캄(동부 티베트)과 암도(동북부 티베트)에서도 한인(漢人)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런 목적 아래 1912년 5∼6월 캄으로 진격한 티베트군은 캄의 중심지인 리탕을 함락했다. 이후 티베트 각지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위안스카이 정부가 쓰촨독군 인창헝(尹昌衡)에게 군사를 충원하여 티베트에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자, 9월에 영국공사 조던은 당시 외교총장 옌후이칭(顔惠慶)을 만나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티베트에서 군사를 철수하지 않으면 중화민국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무력으로 티베트의 독립을 돕겠다고 했다. 이에 중국군은 캄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티베트 정부는 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확고하게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티베트 독립전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고 중화민국 시기에 처음으로 벌어진 ‘제1차 캄전쟁’이라 할 수 있다.

    독립국 vs 자치구

    1912년 7월 13대 달라이 라마는 다시 티베트에 들어왔고 다음해 1월 라싸로 돌아왔다. 중국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구성부분임을 강조하면서 티베트의 이탈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강력한 요구로 위안스카이 정부는 티베트에 관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회의에 참가하기로 동의했다. 이에 영국은 1913년 10월6일 ‘중화민국을 승인한다’고 선포했다.

    영국은 영국, 티베트, 중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임을 통고했고 중국에게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주영 대사관의 천이판(陳貽范)을 대표로 하는 중국 대표단은 영국이 회의장소로 지정한 북인도의 심라로 갔다. 티베트 대표는 뢴첸 섀자 빼조도제였고, 영국대표는 맥마흔(Henry McMahon)이었다.

    1913년 10월13일 심라회의가 시작됐다. 티베트 대표는 티베트를 독립국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대표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이에 영국대표 맥마흔은 조정자를 자처하며 ‘조정안 11조’를 제시했는데, 이것이 ‘심라조약’이다. 그 주요내용은 ‘티베트를 네이짱(內藏)과 와이짱(外藏)으로 구분한다’ ‘중·영 양국은 외장의 티베트 자치를 승인한다’ ‘중국정부는 군대와 관리를 외장에 파견할 권리가 없다’ 등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 대해 중국정부는 비준하지 않았다.

    그런데 심라회의에서 영국대표 맥마흔과 벨은 티베트 대표에게 인도와 티베트의 국경지역에 붉은 선을 그은 지도를 보여주며 이 선(맥마흔선)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것이 나중에 중국과 인도간 국경분쟁의 단초가 된다.

    티베트 정부는 전통적으로 자국이 통치했던 지역을 인도의 국토에 집어넣은 국경선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아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조건을 달아 비준을 유보했다. 그 조건은 영국이 티베트 독립에 도움을 줘야한다는 것, 캄의 중국군을 전부 철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동의한 이 조건은 실현되지 못했다.

    심라회의 당시 티베트 대표는 쓰촨성 서부의 캄과, 간쑤성(甘肅) 남부와 현재의 칭하이성을 포함하는 암도를 자신들의 판도 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지역에 티베트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고 자립적인 토착 세력이 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와 세 차례 국경분쟁

    심라회의 후 영국은 티베트 당국에 차관 ‘300만달러’를 제공했다. 티베트 정부는 이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신군과 총사령부를 설립했다. 영국은 걍쩨에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티베트군 장교를 훈련시켰다.

    이렇게 군비가 갖춰진 1917년 가을 리워체 강에 주둔하는 티베트 병사가 풀을 베러 중국과의 경계선을 넘어가자 중국 변방군이 그를 참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티베트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진사강(金沙江) 주변 지역과 창두를 점령했다. 이것이 1917∼18년에 벌어진 제2차 캄전쟁이다. 그 후 영국의 조정으로 티베트와 중국은 1918년 8월 창두에서 1년 기한의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 분쟁은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다시 한번 벌어졌다. 이 분규의 실질적인 내용은 칭하이와 시캉의 군벌세력과 티베트군이 부딪친 것으로, 베리 토사와 다걔 사원의 재산 분쟁에 중국군과 티베트군이 개입하여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930년 3명의 티베트군 고위장교와 4000명의 기병이 캄을 점령하고 칭하이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티베트군은 초반에는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깐제와 냐롱을 장악한 상태에서 휴전을 하려던 티베트군은 쓰촨과 시캉 변방군의 공격을 받아 깐제와 냐롱은 물론 데게까지 내줘야했다. 1932∼33년 티베트는 시캉, 칭하이와 정전협정을 맺었다. 이것을 제3차 캄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민국시대에 캄에서 세 차례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중국과 티베트는 각기 상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은 중국 내의 모든 민족이 ‘중화민족’을 이루고 있다는 매우 포괄적인 ‘중화민족’ 개념과 국가 내부를 ‘행성’으로 일관되게 구성해야 한다는 ‘행성’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통치권이 미치지 않은 티베트와 외몽골은 예외였지만, 중국내의 모든 지역은 ‘성’으로 편성했다. 이 시기에 역대 어느 시대보다 ‘성’이 많아진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에 반해 티베트는 ‘불교국가’라는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 공화국이 세워짐으로써 불교적 논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이미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법주-시주 관계, 즉 최왼 관계를 중국과의 외교에 적용하고 있었다. 또 티베트 정부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할 영토 범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티베트가 명실상부한 독립국이었는가 아니었는가에는 논란이 있지만, 이 시기에 국가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티베트국’ 정도의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국민당 정부는 매우 포괄적인 ‘중화민족’과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티베트 정책을 집행했다. 1929년 국민당 정부는 몽장위원회를 설치하고 몽골과 티베트에 관한 업무를 처리했다. 1933년 말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자 국민당 정부는 참모부 차장 황무숭(黃慕松)을 보내 조문하기도 했다. 이 때 티베트 당국은 라싸에 몽장위원회 사무처와 영국 대표처를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티베트는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티베트 포용 노력에도 불구, 독립에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으로 영국에 치우친 외교 노선을 걸었다.

    이때 영국정부는 ‘티베트 독립론’에 바탕을 둔 정책을 구사했다기보다는 매우 실용적인 ‘완충국’ 유지 정책을 폈다. 영국정부의 기본 입장은 티베트를 명목적인 ‘종주국’의 이름 아래 실질적인 자치국으로 유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티베트 개혁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한 17조 협의

    1940년대에 들어 티베트에서 독립 추진의 기운이 다시 나타났다. 1941년 친중적인 라쳉 활불이 실각하고 친영적인 따자 활불이 티베트 정권을 장악했다. 1943년 여름에는 까샤에 외교국을 설립했고 1947년에는 티베트 대표단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범아시아 회의’에 참석했다. 1947년 10월 티베트 정부는 상무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었다. 대표단은 800만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티베트 화폐의 준비금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들은 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1949년 3월 티베트에 귀환했다.

    티베트 정부는 1949년 7월8일에 몽장위원회에 근무하는 한족에게 티베트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1950년 1월 티베트 ‘친선사절단’이 영국, 미국, 인도, 네팔 등지에서 티베트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군수지원국을 설립하고 외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무선설비를 도입해 민병을 훈련했다. 티베트군 일부를 아리와(黑河), 창두, 진사장 일선에 배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10월 중국 정부의 인민해방군은 티베트군의 주력이 주둔하는 창두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티베트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 중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티베트는 저항을 포기했다. 1951년 5월23일 중국인민정부와 티베트 정부는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했다.

    ‘17조’는 ▲티베트 인민은 단결하여 제국주의 세력을 티베트에서 몰아낸다 ▲티베트 지방정부는 인민해방군이 군량 및 기타 일용품을 구입하고 수송하는 것에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 인민은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할 권리를 갖는다 ▲중앙은 티베트의 현행 정치제도를 변경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17조 협의는 티베트를 독립국가가 아닌 ‘민족구역자치’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티베트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이런 조치에 대해 저항의 불씨가 커져갔다. 1951년 11월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진주할 때 티베트 씨뢴 루캉와와 로쌍 짜시는 라싸에서 ‘인민회의’를 조직했다. 이후 루캉와는 인도 칼림퐁에서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티베트 분쟁의 근원은 ‘티베트를 독립된 주권국가로 보느냐’ ‘중국의 한 지방으로 보느냐’는 인식의 차이에 있었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티베트 경영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우선 도로를 개통했다. 천짱(川藏)공로와 칭짱(靑藏)공로는 1954년, 신짱(新藏)공로는 1957년에 개통했다. 그리고 캄과 암도에서 토지개혁과 민주개혁을 진행했다. 개혁이 진행되면서 티베트인의 무장저항 운동이 일어 1958년부터는 대규모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도 칼림퐁으로 망명한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자유 동맹’ ‘티베트 복리협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다.

    1959년 3월10일 티베트 라싸에서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시위자들은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며 한인 철퇴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해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다. 그 후 티베트에서 대대적인 반란 또는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1961년에 이르러 대체로 진압됐다.

    티베트 반란 이후 중국에는 봉건농노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여기에는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장악은 억압받는 농노들을 해방시킨 것이라는 해방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1965년 9월1일 티베트에 시짱(西藏)자치구가 성립되었는데 서짱지구는 중국의 정규 행정체계로 편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 고조

    1959년 민중봉기 이후 1970년대 말까지 중국정부와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망명정부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이 중국 전역에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휘몰아쳤고 그 와중에서 종교에서 정체성을 찾는 티베트인들은 심각한 인명 손실을 당했고 상당수 문화재가 파괴됐다. 문화대혁명 이후 티베트 6000여 개의 사원 중에 남은 것은 불과 10개 미만이었을 정도다.

    1980년대에 들어 중국에 몰아친 개혁·개방 물결은 티베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티베트 여러 도시에서 티베트인들보다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경제권을 장악했다. 이런 와중에서 티베트어는 쓸모 없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에 티베트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은 매우 저조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이 티베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대는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의 민족문제도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였다. 1987∼88년에 티베트에서는 여러 차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중국정부는 이를 철저히 탄압했다. 국제사회는 중국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고, 중국 정부는 이를 내정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국익에 따라 태도 달리하는 주변국들

    사실 티베트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된 데에는 미국이 티베트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한 데서 온 측면도 있다.

    미국은 1987년 망명중인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미를 허용하고 그해 9월21일에는 하원 인권소위원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5개항 평화 제안’이란 제목의 연설을 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티베트를 평화지대로 바꾸어 중·인 양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할 것, 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이주정책을 중지할 것 티베트인의 기본인권과 민주자유를 존중할 것 등이다.

    같은 해 10월13일 미 국무장관 슐츠는 하원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티베트의 인권 문제’를 우려하는 발언을 했다. 1991년 4월16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14대 달라이 라마를 접견했다. 미국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중국이 티베트 인권을 침해한다는 명분으로 티베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9월초 달라이 라마는 9·11 테러 발생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달라이 라마는 미의회에서 연설하고 조지 부시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만나 티베트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한편 지난 6월말 인도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인도는 1962년 티베트와 대대적인 국경분쟁을 벌인 바 있다. 인도의 바지파이 총리는 처음으로 ‘티베트는 중국영토’라고 인정하고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티베트를 둘러싼 주변국의 입장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된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는 그 대표적 사례다.

    朴 章 培
    ● 1965년 충남 부여 생
    ● 서강대 사학과 졸업·동 대학원 박사(중국근현대사)
    ● 저서 :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모’(공저) 외

    한국의 기성세대는 주권을 잃은 티베트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한 국가 이익 앞에서 티베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무시되고 말았고 결국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리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 독립운동가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지금 티베트 독립이 쉽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끝)

     

    글: 박장배 한국산업기술대 강사· 사학 plantinoid@freechal.com
    발행일: 2003 년 10 월 01 일 (통권 529 호)
    쪽수: 500 ~ 514 쪽

    2005년 4월 22일 금요일

    [펌]한국과 중국을 저울질 중인 미국

    이상하게 중국과 일본이 쎄게 나가죠? - 미국의 한국/중국 달아보기


    <<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상황 전개,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

    예전에 한-중-일 동북아 3국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시끌시끌할 경우 그 해결수순이 거의 똑같았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엄중항의(?)"하면 일본은 "거, 별거 아닌데.."라고 우기고..
    그러다가 서로 서먹서먹해서 어색해질 즈음에 미국 큰 성님(?)이 점잖게 나서서
    "야..!..시꺼 !!!.. 너거들..싸우지 말고 끽소리 하지 마 !!!"라고 짜증 비슷하게 잔소리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 미국 양/키 성님의 짜증어린 쫑/코를 각자가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 국내에 뿌리고
    "봐라..미국도 우리 편 들지 않냐 ?..."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갈등과 미국의 처신은 위의 예와 사뭇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미국의 후광과 지원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오버한 것이거나
    일본의 침략/팽창주의 기조의 제국주의적 습성이 다시 도진것이 아닐까 하는 분석을 하는 모양이다
    물론 맞는 분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일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이러한 분석이 충분한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미국을 좀더 비중있게 고려한다면 조금 다른 시각의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행동은 결국 미국의 속내와 같기 때문이다.
    원래 일본이라는 나라와 족속의 습성이 그런 것이다.


    일본의 지금 행동과 외교적 미치광이 처신을 놓고 분석하는 것은
    사실 겉부분만 요란하게 파헤치는 것에 다름없다.
    그 일본의 광기어린, 그리고 때로는 치기어린 행동은
    미국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기본 전제 위에서 일본의 행동을 이해해야
    그 분석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감정대립"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고 에둘러 빠져나가는 것은 미국의 음흉스러운 짓거리이다.
    근대사에 있어서 중국과 일본의 국민감정이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요즈음에야 알았으며
    이제는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짐짓 점잖은 체 하는 것도 전부 속보이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핵심은..일본이 왜 지금 이러한 시점에서 그토록 한국과 중국과 피가 튈만큼 긴박한 긴장관계 상황으로 몰고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미국이 음으로 양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말리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왜 거의 수수방관하는 것처럼 일본이 제 입맛대로 날뛰도록 풀어주고(?) 있을까 하는 각도에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일본은 미국의 꼭두각시이고 동물원의 원숭이이며 집안의 애완용 개나 고양이 신세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설치는 것은 미국이 풀어주기 때문인 것이다.
    거꾸로 만약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대하여 아주 조신(?)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이는 미국이 그만큼 일본의 고삐를 꽈악 틀어쥐었기 때문인 것이다.


    << 미국의 21세기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 일본을 통한 한국과 중국 길들이기 전략! >>

    DJ와 노무현정권의 한국이 장차 미국-중국의 양대 세력간 갈등상황에서
    어느 편에 붙을 것인가 하는 것 자체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의 제일 큰 관심사이다.

    향후 최소한 1세기에 걸쳐서 중국은 미국의 최대 경쟁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말이 좋아 경쟁국가지 최악의 경우 세계패권을 놓고 최후의 전쟁을 치러야 할 적대국가 개념이다)

    중국을 견제할 두 카드는 바로 "협박과 회유"이다.
    예전 중국의 경제력이 아프리카 난민 수준에 머무를 때에는 "회유" 카드가 가끔 위력을 발휘했었지만,
    지금은 회유보다는 "협박"카드 밖에 없다.
    협박하되 상대방의 수준에 따라서 적절하게 협박해야만 한다.
    쥐/새/끼 잡을 때,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거꾸로 소 잡을 때 쥐잡는 덫 정도로 덤비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미국은 한국과 중국이 일본이라는 양/키 대리자의 협박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을 시시각각 주도면밀하게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옆집 주인과의 싸움에 먼저 자기 집 개를 풀어서 그 쪽의 반응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단은 한국 노무현 정부의 예상보다 훨씬 강한 반발이 의외의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전같으면 그저 씩씩거리다가 대충 제풀에 꺽이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인데
    노무현정부가 훨씬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이며 또 강성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
    허를 찔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중국이 더욱더 판을 크게 벌리는(?) 것에 대하여 의외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한국과 중국은 성동격서의 전법을 같이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일본을 규탄하고 분기를 표출하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미국의 동북아 정책, 더 나아가 미국의 항구적인 세계패권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꼭두각시 일본을 내세워 한국과 중국을 단도리하는 전략에 대하여 아예 쌍지팡이를 들고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위상변화 및 그 역할의 의미 축소,
    북핵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 내에서의 미묘한 입장변화,
    최근 대외경제교류 측면에서 중국의 비중이 미국을 추월한 점,
    냉전체제와 와해로 인한 북한적대 정책의 완화 추세...
    등등의 사안으로 지금 노무현 정부는 예전의 친미일변도에서 벗어나
    중립적 지위로 탈바꿈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상황과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 미국은 지금 일본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독립/자립 의지"를 시험하고 있다. >>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자들과 일본의 극우집단이 서로 눈짓을 맞추어가면서 한국과 중국을 달아보고 있는 것이다.
    보다 중립적인 입장으로 서려고 노력하는 한국 노무현정권의 의지와 인내력을 시험하고 있으며,
    미국의 제일 위협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국의 반발력과 그 힘의 강도를 재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정부가 짐짓 자국민의 시위를 묵인하는 듯한 태도도 이에 연유한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대놓고 미국을 삿대질할 수는 없으니
    일본이 미국의 속내를 드러내는 역할에 충실한 것 처럼 중국 정부의 속내를 그 시위대가 충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의 고민도 여기에 그 중심이 있다.
    "미-일 패권체제에서 어느정도 거리 두기 & 그러나 중국 쪽에 붙고 있다는 인상을 주면 안되고..
    & 그러면서도 중국 정부에 대하여 한국은 예전과 다르다는 사인을 확실히 심어주어야 하는데..
    & 그런데 이러한 사인이 너무 강해서 미국을 자극해서는 곤란하고...."
    이러한 상황이 바로 지금 한국의 머리 터질 듯한 고민의 실체인 것이다.


    << 이제 한국이 진짜 고민해야 할 때.. >>

    일본의 버르장머리 없고 소갈딱지 없는 동네깡패 소행에 대하여 중국인들이 팔을 걷고 격렬한 시위에 나서고 있는 상황을 보고,
    그저 '속 시원하다', '일본이 결국 제가 뿌린 씨앗을 거두고 있구나..'하는 1차원적 감상에서 벗어나서...
    일본과 중국 시위대 뒤에 숨어있는 미국과 중국의 전세계 패권전략의 갈등 속에서
    과연 우리나라가 취해야만 가장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방향은 무엇일까 한 번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향후 30년내 전세계적인 슈퍼파워로 등장해 미국과 일전을 벌이게 될 중국,
    거리상으로 조금 멀지만 현재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슈퍼파워 제국인 미국,
    그리고 바로 코 앞에 바짝 달라붙어서 미국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하는 일본..
    이 삼각관계의 균형 및 갈등관계 속에서 한국의 입지를 정하고 굳혀야만 하는 민족적인 숙제가 지금 우리 앞에 던져진 것이다.

    이 문제가 만일 북핵문제와 서로 얽히고 섥히는 수준으로 비화되면 또 어떻게 대응해야만 하는 지,
    개헌해서 군부국가체제로 부활하려는 일본의 전략과 또 어떻게 연계시켜 움직여야만 하는 것인 지
    등등의 숙제도 풀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의 의도가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우리가 택하는 손짓, 발걸음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이러한 고민을 노무현대통령이나 청와대 그리고 정치권에만 떠맡기기 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 같이 고민하고 같이 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박유리]

    2005년 4월 13일 수요일

    (펌)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노무현의 치밀한 외교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노무현의 치밀한 외교(재미)

    며칠전에, 북한과 중국에 자주 드나드시는것은 물론이고 인맥을 갖고계시고 국제정세에 대단히 밝은분하고
    저녁먹을 기회가있었는데, 이분과의 대화과정에서 몇가지 재미있는얘기도있고, 제 생각을 확인받을수있었던
    점도있고해서 씁니다.

    일단 라이스의 순방이 의미하는것은 대체적으로 큰틀에서는 일반적인 예측자들의 견해와 같습니다.

    1. 6자회담등에 있어서 중국의 역할등에 대한 압력

    2. 6자회담 재개시한통보 (6월말) - 북핵문제 유엔회부 및 북한봉쇄작전관련



    그런데 제가 주목한건 이런부분들이 아니죠. 이거야 예측못하면 이상한거구요. 독도관련된 한-미-일 삼국간의 불협화음이 예기치못했던 방향으로 튀고있다...이런것과 맞물리는 것이죠. 사실은 우리는 오래전부터 예측하고있던 방향이지만, 동북아시아의 균형자역할...이거는 '중립등거리외교'입니다.

    제가 스스로도 놀라고있는 사실은, 한국정부가 '중립등거리외교하겠다'라고 말을 꺼냈는데도 미국의 반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이죠. 물론 미8군사령관은 제풀에 날뛰고는 있습니다만, 이건 한-미-일 3각군사동맹플랜이 망가져버린데 대한 화풀이 성격이죠. (이지역의 군부에 국한된얘깁니다)

    만약에, 조선일보가 설레발이치는것처럼 미국이 한국의 태도변화가 '배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또 한국정부가 물밑에서 미국을 충분히 설득해내지 못했다면 반응은 파괴적이었을거라고 저는 봅니다. 사실은 미
    국의 태도변화는 탄핵사태이후 부시와 라이스의 한국내상황에 대한 언급에서 이미 나타나있었던거라고 볼수있습니다.

    즉, 탄핵사태를 우리국민들이 촛불로 막아내자 부시나 라이스는 공통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성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이런식의 표현을 씁니다. 이건 다시말해서 이제 한국은 미국이 '공작'을 통해서 좌지우지할만큼의 국민수준을 벗어났다. 즉 미국이 통제권을 상실했다하는 얘기하고 똑같은 얘깁니다. 미국은 자칭 '대국'입니다. 인정할것은 쿨하게 인정한다는거죠. 그런의미에서 이때를 깃점으로 한나라당과 미국의 긴밀한협조는 끝났다고 보는것입니다.

    지난번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미국은 분명히 '탄핵사태의 배후'였습니다. 그당시의 군부동향도 그랬고, 정치
    권이 일치단결해서 미친듯이 일을 벌린배후에는 한나라당과 깊은 조율을 하고있었던 대미라인의 사인이 있지않고서는 불가능한일이라고 봅니다. 즉, 국민의 동의없이 국가반역에 가까운 정권교체를 거사하는데에 미국과의 협의없이 그들이 일을 진행했다고 보는것 자체가 무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탄핵사태를 통해서 한국민의 '의지'를 확인한 미국은 한나라당이 수권할수있는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손을떼버렸고, 지금 조선일보의 우왕좌왕하는 스탠스는 결국 이러한 미국의 '오더'가 없는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봅니다. 즉, 늘 지시받고 움직여오다가 알아서해라가 되니까 왔다갔다하는거지요.


    탄핵사태때 이야기를 조금더해보죠. 고건총리가 물러나면서 몇마디 남긴말중에 '사람을 그렇게 못믿어서야...'어쩌구 하는 말들이있었습니다. 이게 뜻하는게 매우 중요한것인데 사람들은 그냥 대통령과 총리간의 불화정도로 보고 노대통령의 리더쉽에 문제가있지않나하고 문제삼았드랬지요.

    그런데, 지난번글에서 언급했듯이 미국 하바드스쿨에서의 고전총리의 발언은 미국 매파들의 강경론과 글자하
    나 안틀리고 똑같았고, 과거를 돌이켜보면 1987년 6월항쟁때 내무부장관이었던 고건은 그당시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매파였습니다. 다시말해서 고건은 온건론자였던때가 없었다는 애깁니다. 늘 대미추종적이었구요.

    그럼 그가 여야를 막론하고 또 모든 언론에 매우 호의적인 인물로 비춰졌던것은 어떻게 해석해야겠는가? 그건 노대통령이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언론에 비우호적인인물로 비춰졌던것과 반대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대체적으로 여야의 경계를 넘어서 호감을 유지하는인물들은 미국과의 관계가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는게 제 기억입니다. 말이 좀 옆으로 샜지만...

    (중략)

    탄핵의 기간동안, 힘겨루기가있었지만 또한가지 노대통령은 이과정을 통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자들을 가려낼수있었다는 것이죠. 초기에 노대통령 취임이후의 인사는 측근들을 주위에 앉히지 않았더랬습니다. 그것은 그당시 상황에 맞춰서 DJ계열인사들을 많이썼죠, 대표적인게 문희상등입니다. 이를
    통해서 정권을 안정적으로 인수인계받은뒤에는 이들을 내보내고 탄핵사태이후에는 확실하게 검증된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씁니다.

    즉, 정권인수과정에서 구정권에 연계된인사들을 한번기용하고 정리하였고, 그이후에는 미국과의 대화를 위해
    서 친미파를 많이 등용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것이 탄핵사태를 거치면서 필터링이 되었다는 것이죠. 지금 등용하고있는 인사들은 참여정부의 외교,국방노선을 펼쳐나가기위해서 필요에의해서 앉혀진사람들이라고 보면됩니다. 실질적인 국가운영이 탄핵이후에 이뤄졌다는 얘깁니다.

    (글이 길어지니까 끊고 다시 연결하도록하지요)




    * 중략된원문은 www.funnyone.net 윤카피님홈피에있습니다.



    그러니까 탄핵이후에 미국은 작계 5030등과 같은 종류의 '공작'을 남한에 적용하는것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선거직전에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운반선을 불법나포하여 이모후보에게 도움이 되는 대형껀수를 하
    나 올리려다가 되려 망신만당하고 물러난 일을 기억하실겁니다. 이처럼 미국은 남한의 정치상황에 끊임없이 개입해왔으며 단한번도 그러한 영향력을 포기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사태를 거치면서는 소위 '자신들이 만든 민주주의국가'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
    게 되었다는것이죠. 패배를 인정했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북핵문제에 참여정부의 독자적인 권리를 인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아뭏튼 결정적으로 조선동아와 한나라당을 포함한 반개혁세력들의 대리인의 역할을 포기함
    으로써 이땅의 수구세력들은 엄청나게 약화되었고, 약화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모를리 없는 조선일보도 살길을 찾아야하기때문에 지금 이상한변화가 감지되는것이죠. 그러나 개인적으로 조선일보의 환골탈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의 관점에서보면 망해야 맞는것이지요.


    자 그러면 북한에 적용하기로하였던 작계 5030은 어떻게 되었나? 이게 라이스의 동북아순방의 키포인트라고 제가 생각하는겁니다.


    남한은 독도문제를 통해서 일본과의 정치적,외교적 대립각을 세우면서 한-미-일의 삼각군사동맹에서 미국과 일본의 시다바리노릇을 하기를 거부하고있습니다. 즉 한국은 한-미동맹은 강화하되 일본과는 동맹이아니니 손잡을수없다고 노골적으로 군사적협력을 거부하고있는것이지요.

    미국의 압력이 두렵다고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을 덜컥받아버리면, 결국 2008년이전에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있는 대만-중국간의 분쟁에서 한반도는 총알받이 역할을 자임하게 되는 격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군대를 모두끌어들여서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리게된다는 얘기지요. 결국 구한말의 반복입니다.

    그러니 노무현대통령은 필사적으로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것이고, 이것은 한가하게 한-미간의 갈등운운할 성질의 사안이 아닙니다. 민족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문제이니까 말입니다. 만약 어느 언론이나 집단이나 개인이 그런식으로 포장을 한다면, 그것은 그자들이야말로 국익에 반하는 세력임을 드러내는것입니다.

    제가 독도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주장할때 한-미-일 삼각동맹안에 들어가서는 안되지만, 한-미동맹은 강화해야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입니다. 중립등거리외교라는것은 양측세력과 모두 우호적인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한국이 중국과 미국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양쪽의 신뢰를 먼저 받아야한다는 점입니
    다. 그럼 미국이 한국의 '동북아균형자론'을 어떻게 보느냐? 그걸 칭찬하게 만들어야한다는것입니다. 물론 지금 미국의 언론과 군부내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것아니냐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비
    판적인 언사가 튀어나오고있지만, 미국의 경제,군사적 이해관계때문에 미국은 결국 한국의 역할을 인정할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미국의 말을 안들으면 97년 IMF사태처럼 국가경제가 위기에 봉착하는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하시던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그당시 우리는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현재는 충분하다못해 넘치는 외환보유고를 가지고있는데, 반대로 일본은 채권을 발행하고 다시 적자분을 채권으로 메우는 이해할수없는 행태를 통해
    서 현재 IMF당시 발행한 채권이 10년만기로 돌아올 시기를 맞고있습니다. 즉 경제상태가 이만저만 위태로운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점이 바로 일본이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이 터지기만을 일편단심으로 기원하고있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내부로부터의 몰락을 기다리느니, 외부에서 돌파구를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이 다시 금융시장을 통해서 아시아에 개입하려고한다면 제일먼저 쓰러지는것은 한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일본입니다.

    현재 독도문제나 교과서문제등 한반도에대한 일본정부의 막가파식대응은 이런 심리적 불안감을 바탕에 깔고있는 것입니다. 일본국민들은 꿈도 못꿀지 모르지만, 지금 일본의 수뇌부들에게있어서는 전쟁이외의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지경이라는 인식이 팽배해가고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참여정부가 어떤식으로 미국과의 협력을 이끌어내면서 동북아균형자의 역할을 만들어가려고하는가?
    이것의 키워드는 자주국방입니다. 미8군사령관이 주한미군의 방위비지원금액이 줄어든데 대해서 비축탄약을 모두 처분하겠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다는데, 이것은 사실 괜찮은 수순입니다. 현재 우리군이 보유하고있는 비축탄약은 전시에 사용할수있는 양에 비해서 한참 모자라기때문입니다. 약 8일분정도가 우리수중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미군의 소유하에있습니다. 이것을 1조원규모로 사오자는것이죠.

    아울러 미해군성등등을 통한 여러경로로 (인터넷등을통해서도) 지난번 3월하순의 이한호 공군참모총장의 미
    국방문때에 미국의 F15K를 상당수량 추가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것은 없습니다만...이것또한 긍정적인 시그널입니다. (일설에는 80대규모라고하는군요)


    F15K는 실제적으로 전폭기입니다. 전투기가 아니죠. 2차대전당시 폭격기로 이름을 떨쳤던 B-29가 9톤의 폭
    탄적재량을 갖는데 비해서 이 작은 전투기는 6.5톤이 넘는 폭탄적재능력을 가집니다. 실제로 F15K를 보유한다는것은 1800km이상의 행동반경을 가진 다수의 전폭기를 운용한다는 의미이고, 이범위안에는 도쿄를 비롯해서 베이징도 들어와있는 겁니다.

    실제로 군사전문가들사이에서는 특히 공군전문가들사이에서는 2차분의 전투기 구매에서 F16블록60과같은
    최신기종의 F16개량기체를 절반정도 들여오는것이 보다 경제적이고 현존하는 군사전략에 합목적적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물론 40기를 발주한 F15K는 조금 더 들여와야 운용에 문제가 없는 상태이고말입니다. (라팔이나 유로파이터얘기는 하지마십시오. 이들은 2010년까지 대지공격력이 없습니다)

    참여정부가 이한호공군참모총장을 통해서 미 보잉사에 F15K의 대량구매를 타진했다는것은 한국이 한반도에서의 자주적인 작전능력을 확보하려고했다는것이고 이것이 미국군수산업체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때 나타날수있는 부수적인 효과를 주목해서 봐야합니다. 즉, 미국정부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군수산업체에 있어서 한국의 이러한 구매는 한국과의 관계를 확고하게 유지하도록하는 압력행사로 나타날수가있다는 얘깁니다. 한미관계가 불안해질경우 가장큰 타격을 입는쪽은 미국의 군수산업체가 된다는 얘깁니다.

    이런점들을 살펴보면 미국이 한국의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동맹관계를 훼손한다든지하는 행위를 하기 어렵다는것을 쉽게 이해할수있을겁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일본은 대만과 미국과의 3각동맹에는 참여할수있을지 모르지만, 한반도에는 개입하기 어려워질것이라는 것이지요.

    반면에 중국으로서는 이러한 한국의 움직임이 대단히 고무적일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또한 미국의 대중국압
    박이 심해지는 시기에 한국이 완충지대를 자임해주니까, 외교적 신뢰를 보낼수있는 겁니다. 결국 이런과정을 통해서 양측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등거리외교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오해하는 부분은 이러한 중립등거리외교가 마치 스위스의 것처럼 항구적인 시간을 염두에 두고 참여정부가 정책을 운용한다고 하면서 난센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언론이있다는 것이죠. 이건 작금의 동북아정세에 어둡다보니 나오는 해프닝이라고 봅니다.

    한반도는 항구적인 중립지역이 될여건도 안되고, 될수도없습니다. 즉, 참여정부의 중립등거리외교는 몇가지의 목적달성을 위한 한시적인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한-미-일동맹에 끌려들어감으로서 벌어지는 한반도내에서의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
    둘째는, 미-중간의 갈등의 양상과 관계없이 양측과 우호적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

    이렇게 보는것입니다. 즉 큰틀에서보면 통일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고, 작게보면 한반도내에서의 전쟁을 막기위한 제스춰라는것이지요. 이제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드리고, 미국이 펼치려는... 라이스의 마지막 전략을 살펴보기로하죠.


    (다음글로 이어집니다. )
    최근 북한을 방문한 제3국의 인사들중에 감시를 벗어나서 평양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북한주민을 접촉해본 소감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평양에 국한된이야기일수는 있지만, 이들 평양주민들이 남한에서일어나고있는 정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있었다는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루에 몇십분단위로 남한의 뉴스를 제한없이 그대로 티비에서 방영해주는것을 목격하기도했다고 합니다.

    평양주민과의 대화속에서 이분이 느낀것은 이들이 매우많이 알고있으며, 이러한 소통은 북한의 체제가 우리가 알고있는것이상으로 느슨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평양주재 외국무관을 통해서 들은얘기는 중국이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라도 김정일정권을 제거할수있다, 또 북한의 군부는 김정일과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갖고있는것처럼 보인다는 얘기였습니다.

    심지어는 중국내부에서는 (장성급의 발언중 뉘앙스로) 북한정권을 접수할수있는 만반의 준비가되어있다는 얘기도있다고 합니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이후 북한이 펼친 중립등거리외교의 결과 중국이 북한정권내부에 반감을 갖고있는 인사들을 오랫동안 보호해왔다는 점을 볼때 이것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 주목하고있는것은 라이스가 한반도에서의 전략, 즉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에 충실히따라줄 정권을 옹립하고 이를통해서 무력을 동원해서 북한을 정리하고 순차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전략을 수정하였고 이것은 어떤형태로 나타날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력을 사용하는 옵션을 배제하지는 않겠다고했지만, 1순위에서는 뺀것이 확실해보이고, 미국이 선택한 전략이 북한을 유엔에 회부하고, 해상을 봉쇄하는정도로 압박하는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치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 남한이라는 열린통로가있는 상황에서는 비효율적인 전술이 될것이기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부수적인 카드고, 2008년 북경올림픽전에 불거질 대만-중국간의 분쟁이전에 한반도를 정리할수있는 방안이 라이스에게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작계 5030에 준한 북한내부의 쿠테타를 지원하는 방안이었을것이고, 이것은 미국이 직접개입하는것이 아니라 중국을 통해서 사주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즉, 북한정권의 붕괴는 미국-중국 양자모두의 이해관계에 일치하는것이고, 미국은 남한이 반대하는 군사개입이 없이 북한정권을 제거하고 핵무기를 손에넣을수있는 방안이라고 볼수있고, 중국으로서는 일방적으로 남한과 미국의 개입에 의해서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미국의 손에 넘어가는것을 막을수있는 차선책이 될수도있다는 얘깁니다.

    단, 이것은 미리 밝혀두지만 미국의 '사탕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즉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심부름을 시킨뒤에 심부름이 끝나면 사탕을 다시 뺏어버리는....그런 게임말입니다.

    여기서 미국은 한가지 이득을 더 노리고있습니다. 즉 북한이 내부붕괴하면 그 이후에는 미국이 개입하지않아도 남한이 북한문제에 깊숙이 개입할수밖에 없고 이과정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게될것은 뻔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라이스가 이점에 착안했다면 중국을 통한 북한정권의 제거는 더없이 매력적일수 있었을 겁니다.

    즉 남한에 종용하지않아도, 알아서 중국과 군사적,외교적갈등양상으로 갈수밖에 없는 일석이조의 카드가 될수있다는 것이죠. 단 이것은 외교적으로 미-중 양국이외에는 알수가없는 또는 알아서는 안되는 카드입니다.
    제가 이러한 카드가 진행중일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외에 미국이 비교적 현명하게 북핵문제에 대처할수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기때문입니다.


    아울러 피부로 느끼는 국제정세가 저나, 북한과 중국을 많이아는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분들의 견해가 일치해
    가고있다는점에서도 많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지요. 어찌보면 미국이 작전계획에 세워두고있는 '난민'문제에
    도 정부가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수립해두는것이 좋을것같습니다.


    북한정권의 붕괴이후에 일어날 필연적 반작용은 휴전선이 일시에 붕괴하여 난민이 대량으로 넘어오는 사태입
    니다. 반대로 이런일이 발생하지않는다면 북한은 온전히 중국의 영향권하에 넘어갔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준비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말하고있는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하나의 시나리오에 불과할수있지만,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오랜기간동안의 주장들이 압축되어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여기서 크게 벗어난 예측은 저로서는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것입니다.


    6자회담은 그 회담에 참여하는 6자모두에게 있어서 이제 그저 의미없는 춤판에 불과할뿐입니다. 6자회담에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있는것은 한국정부일수밖에는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남북한 당사자들 뿐일지도 모릅니다. 미국과 라이스의 전략적선택은 6자회담장을 넘어 밀실로 들어갔다고 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것은 노무현대통령이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차근차근 대비해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제주도회담에서 과거사를 더이상 거론치않겠다고한 발언은 그당시에는 상당히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에와서는 우리가 한-일관계에서 큰 양보와 아량을 보여준 사례로 인식되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키고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이라크전쟁에 국군을 보냄으로써 지지자들에게 욕을먹었던것과도 같은 맥락인것같습니다. 그당시 그
    러한 선택이 나중에 국가전략적으로 긴요하게 쓰일수있다는 소수의 목소리도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분명히 그
    것은 미국이 한국을 대하는데있어서 주춤거릴수밖에없는 한개의 카드입니다. 또 이러한 수순, 즉 한발먼저 양보하고 준비하고나서 상대의 실수를 용납치않고 응징하는...이런류의 외교전략은 대한민국의 외교사에서는 결코 구경해본적이 없는, 노대통령이 칭찬들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해서는 평가를 미뤄두는것이 옳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아직 시작도 안한 플랜이기때문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자주독립성과 의미에 눈을 뜬다면, 전율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비로서 우리나
    라가 독립해나가는 과정에서 울려퍼지는 자주의 함성이기때문입니다. 남은 3년동안 노무현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행보가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기대되는 이유가 또한 그런데에 있습니다.

    글 출처: http://www.funnyone.net/

    작성자: 뽀띠

    다음에서 퍼왔는데, 원문을 옮기려니 점 귀찮아 다음걸로 퍼왔습니다.

    즐~독~

    (펌) 미국RAND연구소, 동북아한반도상황분석

    (펌)쪽바리킬러 : 미국RAND연구소, 동북아한반도상황분석

     

    지금 우리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외교관계는 썩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봅니다 .
    어제 미국 RAND 연구소에서 작성한

    Do the Ties Still Bind ?The U.S - ROK Security Relationship After 9/11 라는 정말 길고 정교한 보고서를 대충 1/3 정도 읽어보았습니다 .

    제목 그대로 미국의 9.11 이후 미국과 한국의 안보관계는 여전히 강력한가 ? 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이 미국의 RAND 연구소 자체가 이미 미국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단한 곳이라고 봅니다 .Norman D.Levin 이라는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의 정부 관계자.군 지휘관.전문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등을 상대로 철저한 조사끝에 작성된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입니다 .

    정말 정확하고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과거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흘러갔다가 조선군과 백성들의 공격을 받고
    불태워졌던 사실은 물론이고 우리에게는 한없이 한스러웠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RAND 보고서에는 태프트-가쓰라 로 표현되었더군요.)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설명되었습니다 .

    일본과의 제 2차 세계 대전중에 행해졌던 포츠담 조약과 같은 수많은 국제적 회담들에서의 우리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는 미국의 입장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배경은 물론이고 그 당시 상황에서의 미국의 정책과 행동,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50년대.60.70.80.90.2000년 그리고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미간 정치.사회.경제.군사 등등 모든 분야들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었습니다 .

    이 보고서를 의뢰한 기관은 미국 공군이라고 저자가 밝혔습니다 .이 보고서의 요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2 가지인것 같습니다 .

    첫째 , 미국은 남.북한이 분단된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절대로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 없다 !

    그리고 과거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에 행해졌던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했다는 부분까지 설명하면서 한반도 주변국들이 반대해도 미국은 절대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안된다 ! 이 점을 강조합니다 !

    둘째 , 한국을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묶어놓고 중국의 도전에 맞서야 한다 ! 라는 점입니다 .

    이 보고서를 작성한 노먼 레빈은 이미 여러차례 우리나라 언론들도 보도를 했지만 한.미간의 관계에서 어느정도 역활을 하는 사람같습니다 .이 보고서를 읽다보면 미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입장이 많이 변해왔음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미국을 바라보는 입장도 많이 변했고 또 지금도 변하고 있음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

    이 보고서의 내용중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미국은 과거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결국 한반도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져서 수많은 고초와 희생을 겪었다는 점을 미안하게 생각했고 제 2차세계대전의 결말에 벌어진 국제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

    물론 미국은 몇년간의 신탁통치를 원했고 ,한국인들은 이에 반대했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이 북한 지역을 갑작스럽게 점령했고 ,이에 미국이 소련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지원했으며 , 더욱이 한국인으로서 화가나는 점은 미국이 정전협정에서 제안했던 3.8 선은 그냥 몇일만에 임의로 생각했던 것이었으며 미국쪽은 3.8 선이 지금처럼 영원히 분단의 장벽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강대국에 놀아난, 당시 나약하기만 했던 우리의 모습이 떠 올라서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일본을 공산주의의 침략에서 저지하기 위해 그리고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의 여파로 인해서 한국과 강력한 군사적 동맹관계가 수립되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미 합참의 설립 배경도 설명되고 있고 ,전시작전 통제권이나 평시작전 통제권의 이양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서 1960 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우리 한국군을 이용해서 미국의 전세계적인 패권전쟁에 동원시키겠다는 생각들을 고스란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이 생각은 현재도 미국정부의 입장임을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이 노먼 레빈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미국은 나약하고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는 수줍은 한국군대를 베트남 전쟁이나 한.미 연합훈련을 통해서 군사력 증강을 끊임없이 도와주었다는 설명입니다 .

    그리고 지금 현재 추진되고 있는 미군의 해외재배치 전략도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한국과의 마찰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산기지의 이전과 주한미군의 감축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 미국이 한국정부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는 점도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요점은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한국군의 전략증강이나 주변국을 상대로 한 타격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것에 대해서 미국은 도와줄 수 있다 !

    하지만 주한미군은

    이제 한반도 방위만을 위한것이 아니라 국제분쟁이 생기는곳에 얼마든지 주한미군의 병력과 무기를 빼갈수 있다 ! 그리고 이제 한국군도 미국의 전세계적인 패권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전 세계를 상대로 군사력을 사용해야 한다 ! (물론 미국의 지휘하에)

    하지만 미국의 이런 목표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대한민국이 급격하게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향상되면서 , 이제는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고 한국의 목소리를 내면서 때로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를 명백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

    특히 대표적인것이 북한을 보는 한.미간의 이견인데 한국정부나 국민들은 북한과의 평화적인통일을 원하고 있고 , 이러한 바램들이 북한의 핵문제를 강경하게 해결하려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정부가 명백하게 반대를 하고 있다는점이 미국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아주 못마땅한 것이라고 명시해놓고 있습니다 .한국내에서 민족주의가 점점 발호하면서 미국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미국은 화가난 거지요 .이 점이 지금 한.미 관계가 틀어진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

    앞으로 노무현 정부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 들어설 정권들이 어떻게 하면 미국의 입장을 우리 편으로 돌려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뤄내는가가 우리 한민족의 생사를 결정할게 확실합니다 !

    그리고 두번째로

    미국이 중국과 패권을 놓고 한 판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 일본은 100% 확실하게 미국의 편에서서 중국과 한 판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 왜 한국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미국의 불만입니다 !이 점 역시 우리의 결정에 따라서 우리 민족의 장래가 결정될만큼 민감하고 위험한 소재입니다 !

    얼마전에 노무현 대통령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얼마든지 인정해준다 ,단 중국과 타이완의 분쟁에 주한미군의 개입은 용인할 수 없다 ! 라고 ...중국과 대만 그리고 결국 중국과 미국.일본.대만의 전쟁에 우리 대한민국은 절대 말려들지 않겠다 ! 라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

    미국이 열 받을만 하지요 ...

    하지만 우리는 우리민족의 생사(生死)를 놓고 그런 위험한 짓거리를 할 필요는 분명히 없죠 ...미국이 아무리 열을 받더라도 , 반대할 건 분명히 반대해야죠 ...미국은 지금 미.일 신방위조약을 최근 체결하면서일본을 아시아의 패권국 (물론 철저하게 미국에 종속된)으로 내세워서 중국을 거꾸러 트린후 , 미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이 당연히 일본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와서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을 구축하고 싶은 겁니다 !

    제가 전에 부시와 블레어간의 정상회담중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생방송으로 지켜봐서 알만 ,
    부시가 고이즈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정말 실감이 나더군요 . 미.영 정상회담이고 전세계로 생방송되는 와중에도 영국의 블레어 총리에게 "고이즈미를 아느냐? 고이즈미는 진짜 좋은친구다!" 라고 한없이 추켜세우더군요 . 블레어도 "고이즈미를 잘안다." 면서 미소로 화답하고요 .

    부시의 고이즈미 사랑이 이 정도입니다 .

    미국으로서는 , 미국이 하는 말은 고스란히 고분고분하게 다 들어주고 , 돈 내 놓으라고 요구하면 돈도 다 내어주고 , 미국한테 알아서 설설 기는 일본이 얼마나 좋고 , 그런 고이즈미가 얼마나 이쁘겠습니까 ? 반면에 북한핵이나 중국과의 패권전쟁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명백하게 반대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가 봤을때 진짜 밥 맛 없고 싫겠죠 !!!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말입니다 .

    미국은 몰라도 , 한국 사람들보고 일본 밑으로 들어가서 쫄따구 노릇이나 하라고 미국이 요구하면 호락호락하게 수락할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지만원이나 한승조.조갑제.조영남등은 적극 찬성하겠죠 !하지만 한국인들 99% 이상이 목숨걸고 저항할 겁니다 !

    미국은 일본의 UN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진출도 도와주고 ,일본의 군사력과 돈을 끌어들여서
    중국을 거꾸러 트리려고하는데 막상 한국이 미국의 입장에 결사반대를 하니 당황스런 겁니다 !일본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군사력을 대폭 강화해서 중국을 기필코 쓰러트리고

    유럽의 영국처럼 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을 확고히 하려는데 한국이 결사 반대하고 나서니까 열받는거죠 ...게다가 지금 한국의 노무현 정권은 일본의 악의적인 역사왜곡과 독도 영토문제까지 강력하게 성토하면서 한-미-일 동맹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행동을 하니까 미국은 당황스럽고 불쾌한 겁니다 .

    중국이라는 적을 앞에두고 ,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니까 미국은 결코 달갑지 않겠죠 ...게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도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의 현재 판단으로는 전세계 미들파워 스테이트 범주에 들어가는 나라라 한.일간의 분쟁이 전 세계에 속속 보도되면서 일본의 입지 또한 타격을 받고 견제받는게 더 못마땅하겠죠 .

    미국은 결코 한.일간의 전쟁이나 무력충돌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겠죠 . 그런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반드시 미국은 개입합니다 !과거 한국인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를 미국이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이루어 낸 것 처럼요 .

    따라서 앞으로 한국정부는 미국의 이런 면을 노려서 일본의 부당한 역사왜곡이나 영토침탈에 대한 도발을 강력하게 성토하고 대응하면서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도발을 막고 적어도 북한과의 통일을 향한 한국정부의 입장만큼은 확고히 미국이 지지해 주도록 하는 저돌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저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유시민 의원을 지지하고 또 그분들도 한.미간의 동맹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꼭 지켜내야 하는 보루인지는 확실히 알고있다고 봅니다 ! 단, 과거 수구.군사 독재정권처럼 100 % 미국의 말에 따르는 땅강아지가 아니라 우리의 이익을 주장해서 관철시키는,한.미간의 상호이익이 실현되는 동맹관계를 만들어 내야한다고 봅니다 !

    이 노먼 레빈도 여러차례 설명하고 있지만 ,미국은 한국의 성장과 발전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습니다 ! 과거 1950년대의 미국은 한국을 그저 임시로 통치하는 미개한 땅 정도로 생각하고 정책을 펼쳤는데 , 대한민국의 기록적인 성장과 비약적인 국력의 향상을 지켜보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도 계속 바뀌어지고 있고 , 미국이 원하는 한국의 역활도 계속 상향조정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저는 미국이 현재 가장 우려하고 있는 한국내 민족주의의 결집 (특히 북한과의 통일을 원하는)이 결코 미국의 국익에 반(反)하지 않는다는 점을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끊임없이 설득하는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봅니다 .

    그리고 이번 일본의 독도침략 야욕과 역사왜곡에 대해서 한국이 강력하게 어필하고 미국의 동의를 얻어내는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

    우리 대한민국은 결코 일본의 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점을 분명히 미국에 전달해야 한다고 봅니다 !

     

    원문자료: http://www.rand.org/pubs/monographs/2004/RAND_MG115.sum.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