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갈등 지도 (10)|중국 vs 티베트] |
‘중화민족론’ 거부한 政敎合一정권의 1000년 투쟁 |
중국과 티베트의 해묵은 갈등은 티베트를 중국의 한 지방으로 보는 중국과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티베트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한다. 현재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한 상태. 티베트 망명정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독립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티베트 독립문제엔 중국, 인도, 미국, 영국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
중국 난징에서 발행되는 신문 ‘양쯔완바오’ 7월20일자에 ‘통역은 원래 함정이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마안산과 난징의 위화타이 지역을 오가는 장거리 버스에서 2명의 사기꾼이 가짜 달러와 인민폐를 환전한 사기 사건에 관한 기사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버스에 탄 한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통역을 자청한 한 중년남자가 “이 남자는 티베트인인데 난징에 오면서 인민폐를 가져오지 않아 달러와 환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몇몇 승객들이 환전을 해줬고 버스가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두 남자는 사라졌다. 사기사건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이 사건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선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원이지만 그 언어가 확연히 달라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민폐다. 그 사기꾼이 사용한 10위안(元) 짜리 인민폐는 앞뒤에 한족(漢族), 몽골족(蒙古族)의 인물 두상과 조모랑마봉(히말라야산)이 찍힌 구권(1988년 발행)이거나 아니면 앞뒤에 마오쩌둥 두상과 장강삼협이 찍힌 신권(1999년 발행)이었을 것이다. 신권 50위안 짜리 후면에 티베트 포탈라궁이 등장하는데, 인민폐에 티베트 관련 도안이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화폐 도안은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치상황까지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이 경우 인민폐에 티베트궁이 도안된 것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는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 티베트는 중국 서부의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보통 티베트인들은 티베트를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 3대 지역은 티베트의 중심지인 위(중앙 티베트) 지역과 남부의 짱 지역(통칭하여 위짱 지역), 현재 중국 쓰촨성 서부 지역과 창두(昌都) 지구를 포함하는 캄(동부 티베트), 그리고 칭하이(靑海)성과 깐쑤(甘肅)성 남부를 포함하는 암도(동북부 티베트)다. 중국은 1951년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접수하고 티베트의 국가적 존재를 부정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가 13세기 부터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만약 티베트인들이 중국 정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던 이른바 ‘티베트 사변’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티베트 분쟁의 중심에 있던 샤거파를 비롯한 망명 티베트인들은 중국과 매우 상이한 주장을 펴고 있다. 즉 1951년 5월23일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17개조 협의’가 체결되기 전까지 티베트는 독립된 국가였다는 것이다. 티베트를 둘러싼 국제적인 ‘논쟁’은 치열하지만, 실제 티베트에서의 ‘분쟁’은 얌전한 편이다. 다른 분쟁 지역처럼 전투나 폭탄테러가 빈발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 티베트에는 고강도 논쟁과 저강도 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청대의 티베트 정복, 국민당 시대의 세 차례 전쟁, 1950년 무렵 공산정부와의 전쟁, 1959년의 독립운동 등을 거쳐서 나타난 국면이다. 고강도 논쟁과 저강도 분쟁 과거 티베트인들은 ‘티베트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7세기 초반에서 9세기 중엽까지 중국 한족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티베트 지역의 토번(吐蕃)제국에서 연유한다. 토번왕조 전에도 중국과 티베트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가간 접촉은 7세기초 토번 왕조의 쏭쳰감포(569∼650)가 티베트 고원을 통일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전쟁과 화친을 반복한 토번과 당(唐)나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현안은 영토 분쟁이었다. 634년 시작된 토번과 당의 외교관계는 846년 토번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토번왕조 때 티베트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런 경험은 티베트인들이 중국과 티베트를 대등한 위치에 놓게 한 역사적 배경이 됐다.
토번제국의 붕괴 후 티베트는 400여 년간 분열되었다. 그러는 동안 티베트에는 불교가 가장 중요한 사회구성원리로 자리잡았다. 송(宋)대에 이르러 티베트의 일부 세력은 송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 불교와 중국 왕조에의 책봉조공 관계는 이후 티베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중국 정부는 ‘원(元)대 이래로 티베트는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원대에 중국과 티베트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티베트에는 몽골 세력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불교의 유력한 종파인 싸카파 종파에 의한 정교합일 정권이 형성됐고 몽골족은 중원을 통일해 원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원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기존의 책봉조공 관계 외에 ‘최왼’ 관계가 나타난다.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정신적·종교적 지지와 세속적·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법주-시주, 즉 종교적 지도자-세속적 군주)’ 관계가 맺어진 것. 최왼 관계는 당시 싸카파 종파의 고위 승려인 싸카파디따(薩迦班智達)와 칭기즈 칸의 손자인 고댄 사이에 처음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전쟁 없이 티베트를 몽골 제국에 편입시키고 싸카파 종파는 티베트에서 정교합일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싸꺄빤디따를 이어 싸카파 종파를 관장하던 팍빠(八思巴)와 몽골의 쿠빌라이 칸 사이에도 맺어졌다. 상부상조 ‘최왼’ 관계 이러한 최왼 관계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한 것이었다.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고승들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족들이 원나라에 순순히 귀순하도록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했고, 원나라는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정교합일정권을 현실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당시 원나라 경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즉 단순히 원나라의 통치 대상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원나라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원나라 붕괴 후 명(明)나라가 들어섰지만,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은 원나라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명 초기인 1409년 티베트 내부에서 총카파(1357∼1419)가 창립한 겔룩파 종파(黃敎)가 교단의 정화와 계율을 강조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겔룩파 종파는 총카파가 사망한 후 활불전세(活佛轉世)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고승이 사망하면 교단에서 어린 전생자(前生者)를 찾아 계보를 잇는 독특한 승직 계승 방식이다. 이는 후에 달라이 라마 제도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는 3대 달라이 라마 쐬남갸초(1543∼88)에서 시작됐다. 정교일치 사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통치력은 중부 티베트에만 미쳤을 뿐 티베트 전역을 포괄하진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는 티베트를 넘어 몽골과 만주 일원에까지 미쳤다. 겔룩파 종파는 만주에서 청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도 몽골 세력과 최왼 관계를 맺으면서 몽골 부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교합일정권을 지켜왔다. 명대에 이르러 몽골은 동몽골과 서몽골 연맹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1510년 이후 동몽골 부족들이 부족간 갈등을 겪으면서 칭하이(靑海) 쪽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인과 티베트인의 접촉 과정은 몽골군의 일방적인 티베트 점령이 아니라 원대 이래의 최왼 관계를 회복하는 형식을 취했다. 동몽골의 지도자 알탄 칸(1543∼82)은 1578년 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 최왼 관계를 맺었다. 이 만남은 몽골인들 사이에 티베트 불교 신앙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1637년 서몽골 준가르 부족의 일원인 구시칸(?~1656)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에 들어와 5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6년 후 구시칸은 티베트의 내분을 틈타 티베트 전역을 통일하고 티베트 통치권을 5대 달라이 라마에게 보시했다. 이렇게 하여 티베트인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5대 달라이 라마 시대가 열렸다. 1653년 5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해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이 만남은 티베트에게는 최왼 관계의 수립을 의미했으나 청조의 입장은 몽골인에 대한 통제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다. 청조는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최고위 승려인 달라이 라마를 우대했다. 하지만 점차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전제조건은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1720년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역을 장악했다. 청대에는 피정복자 위치로 전락
청조의 티베트 통제는 이전의 왕조들보다 훨씬 강화된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1720년 이후 티베트는 청조에 대해 피정복자의 불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티베트 내 청나라 병력 주둔과 1727년 주장대신(駐藏大臣)의 설치, 1792년 달라이 라마에 대한 금병추첨제도(주장대신이 금병 속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전생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이름과 생년이 쓰여진 상아편을 뽑아 후대 달라이 라마를 결정하는 의식) 도입 등은 티베트의 종속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청조는 18세기 후반 티베트 지역을 포함하는 제국 체제를 완성했다. 18세기 청조의 판도는 현대 중국인의 영토 인식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조는 본부(本部) 18성과 번부(藩部)의 이원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이런 체제 속에서 청조의 변방 민족에 대한 지배는 전례 없이 강한 것이었다. 몽골은 청조의 철저한 ‘분할지배 정책’으로 인해 예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서역도 ‘신장(新疆)’이란 이름으로 청나라에 통합됐다. 또 청조는 동부 티베트인 캄을 쓰촨성 관할 하에 두었고 창두(昌都) 서쪽 땅만 달라이 라마의 관할로 인정했다. 청조는 ‘은위겸용(恩威兼用)’, 즉 은혜와 위력의 탄력적 활용이라는 일종의 상벌 원리로 제국을 운영했다. 티베트에서도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통제가 이뤄졌다. 그런데 은혜의 개념은 매우 광범위해 주장대신을 파견한 것도 황제의 은혜였고, 책봉행사·조공무역과 같은 불평등한 예속관계도 은혜라고 표현했다. 물론 청조의 병력 배치도 은혜였다. 하지만 청 황제와 달라이 라마가 최왼 관계를 형성했다는 티베트인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티베트인들이 단순히 자신을 청조의 피정복민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인들은 청제국 체제에서도 정신적으로는 자신들을 경영진의 일원으로 인식했다. 청조의 공문서는 황제를 ‘천명 황제’라고 표현했으나, 티베트 공문서는 청조 황제를 ‘문수보살 대황제’라고 인식했다. 즉 청조는 황제가 천명을 받은 최고지도자라고 규정했지만, 티베트인들은 황제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불교적 개념인 ‘문수보살’로 인식했다. 티베트인의 자부심이 어떻든 18세기 티베트는 자립성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청조 군대가 티베트에 출병하면서 1751년 맺어진 ‘서장선후장정(西藏善後章程) 13조’와 1793년 ‘흠정장내선후 장정(欽定藏內善後章程) 29조’는 티베트에 청조의 권위를 확실하게 심어놓으려는 조치였다. 또 이는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종교적인 것에만 한정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관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 왕인 문수보살 대황제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즉 1720년부터 1840년대 중반까지 티베트는 공식 문서에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내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자율성은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다. 이는 추후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청조에 복속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티베트에는 중앙정부에 해당하는 달라이 라마의 정교일치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청조는 지속적인 이완과 해체의 과정을 겪었다. 특히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변방 민족들의 자립 경향이 거세졌고 이는 제국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청조는 서구 나라들과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지만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변방 민족과는 가능한 한 전통적인 책봉 조공 관계와 지배 종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1880년 이후 청조는 이전의 본부와 번부라는 ‘이원적 행정체계’를 폐기하고 번부에 본부와 동일한 행성을 설치했다. 청말기에 행성이 설치된 지역은 신장, 대만, 그리고 동삼성(東三省)이다. 본부와 번부의 일원화 정책은 신장에서 먼저 시도됐다. 1864년 회교도 민중의 반란으로 신장 통치가 위협받자, 청조는 양무(洋務) 관료 쭤쫑탕(左宗棠)을 파견해 진압했다. 쭤쫑탕은 청조에 신장에 행성을 설치하자고 건의한다. 이 건의는 1884년 11월17일에 비준을 받는다. 이로써 청조는 행성 설치를 통하여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이완된 제국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다. 청말의 행성 설치는 영국, 러시아 등 유럽 열강과 신흥 열강 일본의 중국 침략이라는 국제적 배경과 변방 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이라는 내부적 배경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유럽 열강 중에서도 티베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영국이었다. 티베트가 영국의 ‘소중한’ 식민지였던 인도와 접해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영국은 두 세기 동안 인도를 통치했다. 영국은 1600년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얻다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을 격파한 뒤 1849년에 이르러 인도 전역을 장악했다. 1830년 이후 영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세력권을 확대하기 위해 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청의 신장에서 부딪혔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는 티베트에서 부딪혔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까지 인도 식민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3개의 완충지대(티베트, 인도양, 아프가니스탄), 2개의 동심원, 1개의 내륙호수(인도양)’라는 전략을 구상했다. 영국인들은 인도양을 ‘브리튼의 호수’로 삼고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는 완충지대, 티베트를 중국의 위협을 흡수하는 완충지대로 설정했다. 또 두 개의 동심원 중에서 안쪽 동심원은 인도 북부 변경의 네팔, 시킴, 부탄과 아삼이었고 바깥쪽 동심원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타이, 티베트였다. 영국과 두 차례 전쟁 끝에 문호 개방 제국주의의 폭풍이 몰려오던 19세기말은 티베트에서도 급변의 시기였다. 인도와 네팔 쪽의 국경지대에서는 인도에 대한 직접 통치에 나선 영국이 티베트에 개방과 통상을 요구했다. 티베트가 자신의 세력범위로 생각하고 있던 재중(시킴)과 부탄은 1861년과 1865년에 영국의 세력범위로 편입됐다. 또 네팔은 1860년 영국-네팔 조약을 맺어 친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티베트 당국에 위협을 가했다. 영국의 위협에 티베트인들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851∼61년에는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승려와 관리들은 종교가 다른 서양인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서약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당시에 청조는 티베트를 개방하라는 영국의 강한 요구와 티베트의 완강한 문호 폐쇄 방침에 직면하고 있었다. 외국인의 티베트 접근이 문제가 된 것은 ‘옌타이 조약’ 체결 이후였다. 1876년 영국은 청정부와 ‘옌타이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중 영국인이 여권을 갖고 티베트를 거쳐 인도와 중국을 오갈 수 있다고 규정한 조항이 있었다. 티베트인들은 이 조항과 관련해 주장대신이 영국인을 비호할 거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7년 티베트 정부 까샤(티베트에서 내각은 까샤로 불림)는 룽툴라 산의 다지링(大吉嶺)에 감시초소를 설치했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티베트와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작은 분쟁끝에 결국 1888년 제1차 티베트-영국 전쟁으로 비화됐다. 이 전쟁에서 영국은 그레이험 장군이 거느린 2000명의 병력이, 티베트는 정규군 900명에 민병들이 참여했다. 1888년 3월 영국군은 룽툴라 초소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러자 13대 달라이 라마와 까샤는 1만여 명의 병사와 민병을 전선으로 보냈지만 티베트군은 영국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임 주장대신 성타이(升泰)는 티베트의 항전을 막으려고 했다. 이 전쟁은 티베트로서는 근대식 화기의 위력을 확인한 값비싼 수업이었지만, 영국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작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티베트 국내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 1890년 청과 영국은 ‘중영회의장인조약(中英會議藏印條約)’ 8조를 체결했다. 여기에는 티베트 문호를 개방한다는 조약이 포함돼 있었으나 티베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상황에서 1895년 8월 13대 달라이 라마는 친정을 시작했는데 영국과의 전쟁, 청조의 신정(新政) 단행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속에 티베트 민의는 독립국 수립으로 모아졌다. 영국은 티베트가 자유로운 통상을 거부하고 이전의 조약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제2차 티베트-영국 전쟁을 시작했다. 영허즈번드 대령 휘하의 영국군은 1150명의 병사와 1만명의 인부로 구성돼 있었다. 1904년 3월31일 영국군과 티베트군이 추믹 계곡에서 처음 부딪친 이래, 영국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티베트군을 내리 격파했고 그해 8월 수도 라싸에 진입했다. 8월3일 13대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우르가(울란바토르)를 향해 길을 떠났다. 제2차 티베트-영국 전쟁은 1904년 9월7일 영허즈번드와 티베트 대표 사이에 라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됐다. 이 조약의 주내용은 티베트의 조모, 걍쩨, 가톡을 개방하고 영국에 배상금 750만루피를 지불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과의 두 차례 전쟁을 통해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야 한다고 느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이 목적을 위해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한편 라싸조약과 영국의 티베트 독립 시도는 청조에 큰 충격을 줬다. 영국은 청조가 라싸조약을 승인하지 않자, 청조와 협상을 벌여 1906년 4월 ‘중영속정장인조약(中英續訂藏印條約)’ 6조를 체결하며 ‘영국과 중국은 티베트의 정치를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또 영국은 1907년 8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러 협정’을 체결해 티베트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막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티베트에서의 청조의 명목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내정에 대한 간섭은 금지한다고 합의했다. 티베트 주도권 놓고 중·영 갈등 청조는 장인탕(張蔭棠)을 파견하여 주장대신 롄위(聯預)와 함께 티베트에 정치개혁을 진행하도록 했다. 청조는 티베트인과 영국의 반대로 티베트에 행성을 설치할 수 없었지만 ‘행성의 도’로 재정비해 군사, 교육 등 광범위한 개혁에 나섰다. 이 개혁의 초점은 달라이 라마를 종교 지도자로만 한정하려는 데 있었다. 이렇게 티베트 중심부에서 개혁이 진행될 때, 동부 티베트에서는 변무대신(川?邊務大臣) 자오얼펑(趙爾豊)의 주도로 ‘개토귀류’ 조치, 즉 토사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현(縣)을 설치하는 작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는 광서제와 서태후의 초대를 받아 1908년 8월3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8월20일 황제와 태후를 만난 자리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는 5대 달라이 라마의 전례에 따라 주장대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상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또 그는 동부 티베트에서 변무대신 자오얼펑이 추진하고 있는 개토귀류 조치와 중부 티베트에서 장인탕이 추진하는 정치개혁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했다. 1909년 겨울 청조는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완전한 ‘영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쓰촨의 육군 병력을 라싸로 파병했다. 1910년 2월12일 청군은 라싸에 진주했고 그 날 달라이 라마 일행은 라싸를 떠나 10일 후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갔다. 롄위는 청정부에 주청하여 13대 달라이 라마의 명호를 박탈했다. 겔룩빠 종파에서 달라이 라마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짱 지역을 관할하던 9세 판첸 라마를 라싸로 와 머물도록 했다. 판첸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 같은 조치는 달라이 라마의 판첸에 대한 원한과 청조에 대한 이심(離心) 정도를 심하게 했다. 쓰촨군의 티베트 장악은 티베트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궁극적으로 티베트 내 친영파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쓰촨 군 내부에 보급품이 원활하게 지급되지 않았고 라싸의 쌀값이 두 배로 뛰자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내부 봉기와 티베트군의 반격으로 쓰촨군은 티베트에서 축출됐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에 돌아와 한인(漢人)을 모두 축출하고 주장대신도 추방했다. 1912년 2월15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선포했다. 그중 3조는 “중화민국 영토는 22행성, 내외몽골, 티베트, 칭하이로 한다”고 규정했다. 4월22일에 위안스카이는 “현재의 오족공화(五族共和)는 몽골, 티베트, 회강 각 지방이 함께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라는 명령을 반포하였다. 1912년 6월22일 중국 국무원 회의에서 티베트에 행성을 설치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 조던은 위안스카이에게 “영국의 입장은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대해 종주권이 있을 뿐 주권은 없다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중국정부가 이에 반발하자 영국은 즉각 티베트 당국이 티베트 독립을 선언하도록 했고 이를 영국이 첫 번째로 승인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티베트 지역에 행성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영국과 티베트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위안스카이 정부는 1912년 7월 몽장사무국(蒙藏事務局)을 설치해 티베트와 몽골 관련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군대의 내분을 이용해 중부 티베트뿐 아니라 캄(동부 티베트)과 암도(동북부 티베트)에서도 한인(漢人)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런 목적 아래 1912년 5∼6월 캄으로 진격한 티베트군은 캄의 중심지인 리탕을 함락했다. 이후 티베트 각지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위안스카이 정부가 쓰촨독군 인창헝(尹昌衡)에게 군사를 충원하여 티베트에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자, 9월에 영국공사 조던은 당시 외교총장 옌후이칭(顔惠慶)을 만나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티베트에서 군사를 철수하지 않으면 중화민국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무력으로 티베트의 독립을 돕겠다고 했다. 이에 중국군은 캄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티베트 정부는 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확고하게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티베트 독립전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고 중화민국 시기에 처음으로 벌어진 ‘제1차 캄전쟁’이라 할 수 있다. 독립국 vs 자치구 1912년 7월 13대 달라이 라마는 다시 티베트에 들어왔고 다음해 1월 라싸로 돌아왔다. 중국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구성부분임을 강조하면서 티베트의 이탈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강력한 요구로 위안스카이 정부는 티베트에 관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회의에 참가하기로 동의했다. 이에 영국은 1913년 10월6일 ‘중화민국을 승인한다’고 선포했다. 영국은 영국, 티베트, 중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임을 통고했고 중국에게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주영 대사관의 천이판(陳貽范)을 대표로 하는 중국 대표단은 영국이 회의장소로 지정한 북인도의 심라로 갔다. 티베트 대표는 뢴첸 섀자 빼조도제였고, 영국대표는 맥마흔(Henry McMahon)이었다. 1913년 10월13일 심라회의가 시작됐다. 티베트 대표는 티베트를 독립국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대표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이에 영국대표 맥마흔은 조정자를 자처하며 ‘조정안 11조’를 제시했는데, 이것이 ‘심라조약’이다. 그 주요내용은 ‘티베트를 네이짱(內藏)과 와이짱(外藏)으로 구분한다’ ‘중·영 양국은 외장의 티베트 자치를 승인한다’ ‘중국정부는 군대와 관리를 외장에 파견할 권리가 없다’ 등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 대해 중국정부는 비준하지 않았다. 그런데 심라회의에서 영국대표 맥마흔과 벨은 티베트 대표에게 인도와 티베트의 국경지역에 붉은 선을 그은 지도를 보여주며 이 선(맥마흔선)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것이 나중에 중국과 인도간 국경분쟁의 단초가 된다. 티베트 정부는 전통적으로 자국이 통치했던 지역을 인도의 국토에 집어넣은 국경선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아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조건을 달아 비준을 유보했다. 그 조건은 영국이 티베트 독립에 도움을 줘야한다는 것, 캄의 중국군을 전부 철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동의한 이 조건은 실현되지 못했다. 심라회의 당시 티베트 대표는 쓰촨성 서부의 캄과, 간쑤성(甘肅) 남부와 현재의 칭하이성을 포함하는 암도를 자신들의 판도 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지역에 티베트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고 자립적인 토착 세력이 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와 세 차례 국경분쟁 심라회의 후 영국은 티베트 당국에 차관 ‘300만달러’를 제공했다. 티베트 정부는 이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신군과 총사령부를 설립했다. 영국은 걍쩨에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티베트군 장교를 훈련시켰다. 이렇게 군비가 갖춰진 1917년 가을 리워체 강에 주둔하는 티베트 병사가 풀을 베러 중국과의 경계선을 넘어가자 중국 변방군이 그를 참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티베트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진사강(金沙江) 주변 지역과 창두를 점령했다. 이것이 1917∼18년에 벌어진 제2차 캄전쟁이다. 그 후 영국의 조정으로 티베트와 중국은 1918년 8월 창두에서 1년 기한의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 분쟁은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다시 한번 벌어졌다. 이 분규의 실질적인 내용은 칭하이와 시캉의 군벌세력과 티베트군이 부딪친 것으로, 베리 토사와 다걔 사원의 재산 분쟁에 중국군과 티베트군이 개입하여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930년 3명의 티베트군 고위장교와 4000명의 기병이 캄을 점령하고 칭하이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티베트군은 초반에는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깐제와 냐롱을 장악한 상태에서 휴전을 하려던 티베트군은 쓰촨과 시캉 변방군의 공격을 받아 깐제와 냐롱은 물론 데게까지 내줘야했다. 1932∼33년 티베트는 시캉, 칭하이와 정전협정을 맺었다. 이것을 제3차 캄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민국시대에 캄에서 세 차례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중국과 티베트는 각기 상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은 중국 내의 모든 민족이 ‘중화민족’을 이루고 있다는 매우 포괄적인 ‘중화민족’ 개념과 국가 내부를 ‘행성’으로 일관되게 구성해야 한다는 ‘행성’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통치권이 미치지 않은 티베트와 외몽골은 예외였지만, 중국내의 모든 지역은 ‘성’으로 편성했다. 이 시기에 역대 어느 시대보다 ‘성’이 많아진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에 반해 티베트는 ‘불교국가’라는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 공화국이 세워짐으로써 불교적 논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이미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법주-시주 관계, 즉 최왼 관계를 중국과의 외교에 적용하고 있었다. 또 티베트 정부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할 영토 범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티베트가 명실상부한 독립국이었는가 아니었는가에는 논란이 있지만, 이 시기에 국가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티베트국’ 정도의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국민당 정부는 매우 포괄적인 ‘중화민족’과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티베트 정책을 집행했다. 1929년 국민당 정부는 몽장위원회를 설치하고 몽골과 티베트에 관한 업무를 처리했다. 1933년 말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자 국민당 정부는 참모부 차장 황무숭(黃慕松)을 보내 조문하기도 했다. 이 때 티베트 당국은 라싸에 몽장위원회 사무처와 영국 대표처를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티베트는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티베트 포용 노력에도 불구, 독립에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으로 영국에 치우친 외교 노선을 걸었다. 이때 영국정부는 ‘티베트 독립론’에 바탕을 둔 정책을 구사했다기보다는 매우 실용적인 ‘완충국’ 유지 정책을 폈다. 영국정부의 기본 입장은 티베트를 명목적인 ‘종주국’의 이름 아래 실질적인 자치국으로 유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티베트 개혁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한 17조 협의 1940년대에 들어 티베트에서 독립 추진의 기운이 다시 나타났다. 1941년 친중적인 라쳉 활불이 실각하고 친영적인 따자 활불이 티베트 정권을 장악했다. 1943년 여름에는 까샤에 외교국을 설립했고 1947년에는 티베트 대표단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범아시아 회의’에 참석했다. 1947년 10월 티베트 정부는 상무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었다. 대표단은 800만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티베트 화폐의 준비금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들은 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1949년 3월 티베트에 귀환했다. 티베트 정부는 1949년 7월8일에 몽장위원회에 근무하는 한족에게 티베트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1950년 1월 티베트 ‘친선사절단’이 영국, 미국, 인도, 네팔 등지에서 티베트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군수지원국을 설립하고 외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무선설비를 도입해 민병을 훈련했다. 티베트군 일부를 아리와(黑河), 창두, 진사장 일선에 배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10월 중국 정부의 인민해방군은 티베트군의 주력이 주둔하는 창두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티베트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 중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티베트는 저항을 포기했다. 1951년 5월23일 중국인민정부와 티베트 정부는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했다. ‘17조’는 ▲티베트 인민은 단결하여 제국주의 세력을 티베트에서 몰아낸다 ▲티베트 지방정부는 인민해방군이 군량 및 기타 일용품을 구입하고 수송하는 것에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 인민은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할 권리를 갖는다 ▲중앙은 티베트의 현행 정치제도를 변경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17조 협의는 티베트를 독립국가가 아닌 ‘민족구역자치’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티베트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이런 조치에 대해 저항의 불씨가 커져갔다. 1951년 11월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진주할 때 티베트 씨뢴 루캉와와 로쌍 짜시는 라싸에서 ‘인민회의’를 조직했다. 이후 루캉와는 인도 칼림퐁에서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티베트 분쟁의 근원은 ‘티베트를 독립된 주권국가로 보느냐’ ‘중국의 한 지방으로 보느냐’는 인식의 차이에 있었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티베트 경영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우선 도로를 개통했다. 천짱(川藏)공로와 칭짱(靑藏)공로는 1954년, 신짱(新藏)공로는 1957년에 개통했다. 그리고 캄과 암도에서 토지개혁과 민주개혁을 진행했다. 개혁이 진행되면서 티베트인의 무장저항 운동이 일어 1958년부터는 대규모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도 칼림퐁으로 망명한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자유 동맹’ ‘티베트 복리협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다. 1959년 3월10일 티베트 라싸에서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시위자들은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며 한인 철퇴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해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다. 그 후 티베트에서 대대적인 반란 또는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1961년에 이르러 대체로 진압됐다. 티베트 반란 이후 중국에는 봉건농노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여기에는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장악은 억압받는 농노들을 해방시킨 것이라는 해방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1965년 9월1일 티베트에 시짱(西藏)자치구가 성립되었는데 서짱지구는 중국의 정규 행정체계로 편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 고조 1959년 민중봉기 이후 1970년대 말까지 중국정부와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망명정부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이 중국 전역에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휘몰아쳤고 그 와중에서 종교에서 정체성을 찾는 티베트인들은 심각한 인명 손실을 당했고 상당수 문화재가 파괴됐다. 문화대혁명 이후 티베트 6000여 개의 사원 중에 남은 것은 불과 10개 미만이었을 정도다. 1980년대에 들어 중국에 몰아친 개혁·개방 물결은 티베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티베트 여러 도시에서 티베트인들보다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경제권을 장악했다. 이런 와중에서 티베트어는 쓸모 없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에 티베트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은 매우 저조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이 티베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대는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의 민족문제도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였다. 1987∼88년에 티베트에서는 여러 차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중국정부는 이를 철저히 탄압했다. 국제사회는 중국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고, 중국 정부는 이를 내정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국익에 따라 태도 달리하는 주변국들 사실 티베트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된 데에는 미국이 티베트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한 데서 온 측면도 있다. 미국은 1987년 망명중인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미를 허용하고 그해 9월21일에는 하원 인권소위원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5개항 평화 제안’이란 제목의 연설을 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티베트를 평화지대로 바꾸어 중·인 양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할 것, 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이주정책을 중지할 것 티베트인의 기본인권과 민주자유를 존중할 것 등이다. 같은 해 10월13일 미 국무장관 슐츠는 하원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티베트의 인권 문제’를 우려하는 발언을 했다. 1991년 4월16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14대 달라이 라마를 접견했다. 미국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중국이 티베트 인권을 침해한다는 명분으로 티베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9월초 달라이 라마는 9·11 테러 발생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달라이 라마는 미의회에서 연설하고 조지 부시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만나 티베트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한편 지난 6월말 인도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인도는 1962년 티베트와 대대적인 국경분쟁을 벌인 바 있다. 인도의 바지파이 총리는 처음으로 ‘티베트는 중국영토’라고 인정하고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티베트를 둘러싼 주변국의 입장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된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는 그 대표적 사례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주권을 잃은 티베트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한 국가 이익 앞에서 티베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무시되고 말았고 결국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리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 독립운동가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지금 티베트 독립이 쉽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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