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5일 월요일

종주국이 버린 '한글'

종주국이 버린 ‘한글’
우리에게 〈대지〉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작가 펄 벅은 한글이 세계에서 견줄 상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간결하며 체계적인 글자라고 칭송한 바 있다. 세종대왕을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1397년에 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에 났으니, 다빈치는 세종대왕이 돌아가신 1450년보다 2년 뒤에 태어났으므로 천재들끼리 배턴터치를 한 셈이다.
사실 펄 벅말고도 한글을 사랑하는 세계의 거물급 팬들은 한둘이 아니다. 미국의 레어드 다이아몬드라는 학자는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1994년 6월호)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침이 마를 정도로 극찬한 바 있고, 시카고 대학의 매콜리 교수는 한글날을 개인의 학문적 경축일로 삼아 해마다 10월9일만 되면 한국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개인만이 아니다. 애틀랜타 올림픽이 열리던 1996년에 프랑스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글을 세계공용 문자로 쓰자’는 주제로 세계의 언어학자들 간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일년 후인 97년 10월1일 훈민정음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세계가 한글의 우수성을 앞다투어 칭송하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어찌된 영문인지 그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어려운 논리로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켰다. 세계는 한글에 날개를 달아주었는데 우리는 그 날개의 깃털을 뽑아버린 꼴이다.
세계의 한글 사랑은 꽤 오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86년부터 유네스코가 ‘킹 세종 프라이즈’라는 이름의 상을 제정해, 인류의 문맹률을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그 상을 주고 있다. 놀라우리만큼 안타까운 것은 세계가 한글의 우수성을 앞다투어 칭송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 정작 한글의 ‘종주국’인 우리나라는 어찌된 영문인지 그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어려운 논리로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켰다. 세계는 한글에 날개를 달아주었는데 종주국은 그 날개의 깃털을 뽑아버렸다.
누가 뭐래도 한글은 예상을 깨고(?) 프랑스어보다 앞선 세계 10번째 정도로 사용자가 많은 언어이며, 누가 특별히 로비한 것도 없이 그 스스로의 감출 수 없는 우수성 때문에 세계 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현존하는 전설로 인정받으며 이상적 세계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모든 사실들이 정작 종주국에선 관계 당국자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전히 한글날은 그 지위에 걸맞은 국경일로 복권되지 못한 채 우리의 관심과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서울시는 이미 영어 상용화를 추진하며 영어존, 영어마을 건립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영어 상용화든, 존이든, 마을이든 어떤 모종의 내재적 정당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에 대한 우리 종주국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왜 자꾸만 벌건 대낮에 자랑스럽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어느 소설 속 바보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일까? 오직 그 우수성을 부정하는 데 막대한 로비가 필요할지 모르는 한글을 신원시키는 일이 왜 종주국에서만 이리도 감정적이고 인위적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경근/서울 목동 한가람고 영어교사/04. 10. 14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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