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상 가장 무서운 존재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가 바로 영화 <에일리언>연작에 등장하는 외계인이다. 이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는 그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기 때문만도 아니고, 피가 황산이기 때문만도 아니며, 입이 이중 삼중이어서도 아니다. 그놈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일리언은 애초부터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숙주를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되어 있고, 변태를 마치고는 숙주를 죽이고 튀어나오게 되어 있고, 튀어나온 다음에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죽이게 되어 있다. 그들은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냥 살육이 원래 그들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고로 그들과 우리는 정말 아무런 소통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바뀐다면 뭔가 대화나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고로 남은 건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뿐이다.
이렇게 너무도 달라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존재가 있는 반면에, 이와는 정반대 위치에 있는 존재도 있다. 복제인간 즉 클론(Clone)들이 그렇다. 게놈 프로젝트와 배아복제 연구가 촉발시킨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 클론들은 영화 <멀티플리시티>나 <여섯 번째 날>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고, 최근 영화 <스타워즈>에서는 아예 한 행성의 군대 전체를 채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과학적으로 봤을 때 클론은 사실 대단히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일란성 쌍둥이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왠지 복제인간이라고 하면 뭔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모양이다. 그 다른 면은 바로 그들이 우리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다는 점이다. 클론은 원본 인간과 영혼까지 공유할 것이라는 식의 말도 안되는 상상이 그래서 나온다. 어쨌거나, 에일리언이 나와 너무 달라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를 상징한다면, 클론은 나와 너무 같아서 의사소통이 불필요한 존재를 대표한다.
그럼 진짜 우리들은 어떤 존재일까? 아마 에일리언과 클론 사이의 어딘가에 끼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비슷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서로 통하는 말을 하며,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런 클론적인 속성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를 통해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공동체 형성의 본능은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남들의 행동을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olomon Asch)는 그의 유명한 동조 실험에서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틀린 답을 말하면 정답을 아는 사람도 결국 그 틀린 답을 말하게 되더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인간의 동조본능은 강하다. 혹자는 이것을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으로 치부하지만, 이런 동조행동이야 말로 공동체 구성의 기본 조건이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본능이다. 생존을 위한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서로 동조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 이 공동체에서는 일탈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같은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고 혼연일치되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공동체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뭉쳤고 흩어지는 자에겐 가혹한 벌을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가끔 상대방과 내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외감이나 이질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실 인간은 아주 사소한 차이만으로도 서로를 구분하고 공격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1천만 명을, 2차 세계대전으로 5천만 명을 학살한 존재가 인간이다. 따지고 보면 결국 똑같은 사람들인데도 종교가 다르다거나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족학살을 자행한다. 최근까지도 알바니아 같은 곳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보기엔 똑같아 보이는 유럽사람들인데 서로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까? 일본이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중국사람들도 유럽사람들이 보기엔 똑같아 보이는 아시아인들일 테니 말이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사는 지역이 조금 다르다거나 경력이 좀 다르다고 차별하는 일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어떤 때는 클론처럼 이심전심으로 서로 마음이 통하지만, 또 어떤 때는 에일리언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는 셈이다.
이번에 전방감시초소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이 나온다. 그 중에는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가장 많이 나오는, 이 모든 것이 군의 기강이 느슨해져서 벌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강은 '기율과 질서'를 뜻하는 단어라는데, 쉽게 풀자면 조직 내의 단합과 결속력을 뜻한다. 기강이 잘 잡혀 있는 조직은 구성원들간의 일체감이 강하고 한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는 조직이고, 기강이 잘 잡혀있지 않은 조직은 구성원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중구난방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따라서 군의 기강을 문제삼는 주장은 군이라는 조직은 원래 모든 구성원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제는 사람들이 가진 클론적인 속성만을 기대한 결과가 아닐까?
적어도 예전에 우리는 클론처럼 살아왔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똑같은 책을 외우고 똑같은 대답을 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우리나라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지필 시험만으로 법관도 뽑고 공무원도 뽑는데, 이 지필 시험은 사실상 한 인간이 얼마나 클론화 되었는지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정답으로 정해진 규격에 맞는 사람만이 뽑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떨궈져 나가는 제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클론적인 삶에 익숙해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것이 정상이라고 믿는다. 국민정서, 국론통합이라는 말도 결국 그 정상상태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정상 상태가 깨어지는 것 같은 현상이 벌어지자 두려워하고 화를 낸다. 하지만, 이건 원래 정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방송매체의 채널도 많아지고 인터넷을 비롯한 다른 미디어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가진 에일리언적인 모습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는 있지만, 원래 그런 속성은 우리 속에 늘 잠재해있었다.
군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조직들 대부분은 클론들끼리만 잘 살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해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한데 묶어야 할지를 고민하기보다는, 비슷한 사람들을 집어넣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쳐내는 방식으로도 잘 먹고 잘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이렇게 클론들끼리의 제국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그 효과를 넘어서는 시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사건도 아까운 8명의 목숨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군이라는 한 조직에 대한 내부와 외부의 신뢰를 모두 깎아먹어 버렸지 않은가. 이런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을 클론이 아니라 아예 서로 다른 에일리언들로 전제하고 시작하는 조직구조가 필요하다. 에일리언과 합의를 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제도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상대방을 자기 클론으로 전제하고 대하다가 어느 날 그 상대가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무슨 에일리언을 만난 것처럼 놀라고 밟아 죽이려 덤비는 사람들을 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은 나만 갖는 꿈은 아니리라.
- 무비위크 6.30
|
원본 출처: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55566.htm
댓글 없음:
댓글 쓰기